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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미국 혁신주의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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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26 00:00 수정 : 2008-09-1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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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제국의 탄생을 되돌아보는 <백색국가 건설사>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유전적인 퇴화 및 불완전한 장애 요소가 있어서 사회적으로 부적합한 자녀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 일반 시민이건 수용시설의 수감자이건, 성격·성별·나이·결혼 여부·인종·재산에 관계없이….”

1920년대 미국 버지니아주가 도입한 ‘단종법’은 강제 불임시술 대상자를 이렇게 규정했다. 1897년 미시간주에서 시작된 ‘단종법’ 도입 움직임은 1907년 인디애나주에서 처음 입법에 성공한 뒤 미국 전역으로 확산돼갔다.

2차 대전 이후 우생학에 기댄 히틀러 정권의 학살극에 대한 비판이 대두하면서 이 법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졌지만, 일부 주에선 1960년대까지 간헐적으로 강제 불임시술이 이뤄졌다. 이 기간 동안 미국 전역 33개주에서 모두 6만5천여 명이 강제 불임시술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야만’을 부추긴 논리적 토대가 ‘사회적 향상’을 강조했던 ‘혁신주의’(progressivism) 운동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오늘의 미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는 탓이다.


<백색국가 건설사>(박진빈 지음, 앨피 펴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미국을 풍미했던 혁신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추적한다. 미국사를 전공한 지은이는 수많은 당시 사진과 각종 자료를 곁들여 ‘젊은 제국’ 미국이 이 무렵 어떻게 개혁을 했고, 그 개혁이 미국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했는지를 촘촘히 들여다본다.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6개 주제를 내리 읽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계획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미국이란 사회가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진다.

4년여에 걸친 남북전쟁이 1865년 막을 내리고 1869년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면서 미국은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1900년을 전후로 미국의 산업 생산력은 구대륙 유럽을 앞서기 시작했고,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수많은 사회적 과제를 안겼다. 나라 밖에선 소극적 불개입주의의 상징이던 ‘먼로주의’가 미국판 식민지배 전략으로 둔갑하면서 ‘젊은 제국’은 태평양 너머까지 세력을 넓혀나갔다. 혁신주의가 태어난 시대적 토양이다.

글쓴이는 “더욱 강력하고 위대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미국의 꿈’에서 출발한 혁신주의는 태생적으로 제국주의와 닮은꼴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열등한’ 세계를 개혁하고 향상시켜야 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한 혁신주의가 제국주의를 거쳐, 내부 혁신의 한 방식으로 인종주의적 우생학으로 나아간 것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혁신주의 운동을 ‘비민주적’이라고 평가한 글쓴이는 “그들은 ‘사회 정의’를 추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 통제’마저 합리화했으며, 혁신주의 개혁가들이 보인 강압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방식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꼬집는다. 문제는 이런 혁신주의 전통이 ‘테러와의 전쟁’ 시대를 맞아 더욱 위세를 부리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내에서 ‘제국의 몰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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