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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연애의 쌩얼, 개그 안에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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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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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썩어나는 선남선녀들이 쿨하게 만나는 사랑이야기에 질리셨는가… 이기심·집착·스킨십의 욕망까지, 솔직하고 민망해서 웃긴 연애 개그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드라마나 영화가 보여주는 수많은 얘기 중 가장 비현실적인 소재는 사랑이다. 외모에 돈, 능력, 매너, 순정까지 갖출 건 다 갖춘 선남선녀 언니오빠들은 쿨하게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한다. 돈이 썩어나는지 감동적인 이벤트도 자주 한다.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이라는 영화가 있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친구에게 차이려고 추한 짓을 하다가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인데, 이 영화를 보면 저게 차이려고 그러는 건지 매력 있으려고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뒤질세라 콧방귀를 뀌는 이들이 있다. “못생긴 것들이 잘난 척하기는! 그 정도 가지고 차이겠어? 이 정도는 해야지!”를 외치는 개그맨들이 소개하는 ‘연애하면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4가지’가 여기 있다.

연애에서 절대 해서는 안되는 4가지


첫 번째 ‘궁극의 이기주의로 무장하기’다. <개그콘서트> ‘연인’의 유상무·김지민 커플을 보자.

연애 개그는 개그 프로그램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소재다. <개그콘서트>의 ‘연인’(위)과 <개그야>의 ‘주연아’(아래) 같은 연애 개그 코너들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상황으로 웃음을 선사한다.

예쁘고 돈 많고 애교도 많은 공주병 초기 지민이의 남자친구인 오빠는 매일 약속 시간에 늦고 능글맞은데다 마초기까지 있는 백수다. 쪼잔하기 이를 데 없어서 돈 한 푼에 벌벌 떤다. 또 지민이 전 남자친구에게 취직시켜달라고 애걸하기도 하고 지민이를 보내주는 대신 5만원을 뜯어내기도 한다. 그래도 성격은 얼마나 둥글둥글한지 매일 “오빠, 기분 좋아졌어!”를 연발한다. 아, 이게 당신의 고등학교 동창의 중학교 동창 남자친구 얘기라고?

두 번째 ‘집착은 기본, 스토킹은 선택’이다. 막을 내린 <웃찾사>의 ‘누구야’는 연애 교과서에 길이 남을 코너다. 범용이는 특별히 기억력이 좋은 건 아닌데 연상의 연인인 누나에 관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머리에 저장하고, 의심은 또 어찌나 많은지 작은 단서 하나만 있어도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눈을 흘긴다. 매일 찡찡대고 “나 가지고 논 거예요? 우리 엔조이예요?”를 연발하며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는 자, 그의 이름은 범용이다. 어, 그런데 남의 얘기가 아니라고? ‘나 가지고 논 거예요?’는 연애 유경험자라면 십중팔구는 해봤을 법한 멘트다.

세 번째는 ‘공과 사, 절대 구분하지 말지어다’. <개그콘서트>의 오래된 연인 강유미·유세윤 커플은 ‘사랑의 카운슬러’에서 사랑의 고민을 직접 몸으로 보여준다. 이 커플이 한시라도 빠른 실연을 위해 주는 조언은 연애에서도 직업정신을 십분 발휘하라는 것. 선생님이면 집에서도 가르치려 들고 팬클럽 회장이면 집에서도 풍선 색깔과 구호 연습은 필수다. 일터에서 연애 정신을 발휘하는 사례도 있다. <개그야>의 ‘주연아’에서 과외 선생님은 띠동갑 제자와 공부는 안 하고 짬뽕 그릇만 샌다. 그릇이 쌓이면 마음도 쌓여간다. 그런데 주변에 과외 선생님과 눈 맞은 커플? 은근히 많다. 여자친구가 취재원이라도 되는 양 인터뷰하듯 대화하던 선배도 뇌리에 스친다.

네 번째 ‘어떻게든 한 번 더 만져보려고 애써라’다. <웃찾사>의 ‘놀아줘’에는 베드신(神)을 믿는 불멸의 작업남이 등장한다. 늘씬한 여자친구만 만나면 으슥한 공원이나 노래방, 산속에 있는 시골집만 찾는 이 작업남은 어떻게든 신체접촉의 고지를 오르려고 별의별 핑계를 다 만든다. 깐죽이 4인방이 매번 방해를 놓으니 망정이지, 깐죽이가 없었다면 이 커플 진작에 애엄마 애아빠 됐을 분위기다. 그런데 또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변에 태명이 꽤나 독특했던 아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태명이 뭐였더라, ‘2번방’ ‘베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연애하면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4가지’는 사실 ‘연애하면서 누구나 겪는 4가지’다. 연애가 꿈꾸는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고 생각하는 것만큼 멋지지 않다는 속성을 알기 때문에 웃게 되고 현실 속 남녀들이 개그 속 남녀처럼 여러 가지의 덕목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웃게 된다. 연애 개그는 얼마나 속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느냐가 관건이다. 연애 개그 코너의 웃음점은 연애를 하면 누구나 겪는 상황을 과장해서 연기하거나 살짝 비트는 데 있다.

‘연애하면서 누구나 겪는 4가지’는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4가지’다. 아무리 오빠가 속을 썩여도 지민이는 그 다음회에 또다시 오빠 손을 잡고 나타나며 범용이가 그렇게 찡찡대도 누나는 꼭 안아준다. 강유미·유세윤 커플도 매번 역경에 부딪히지만 아들 민수와 즐거운 결혼생활을 쭉 유지하고 있다. 주연이는 말을 더듬는 선생님과 계속 애틋하게 짬뽕 그릇을 세고 있을 것이며 작업남도 언젠가 깐죽이 눈을 피해 소정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 사랑이 ‘포샵’한 연애라면 개그 프로그램 속 사랑은 연애의 ‘쌩얼’이다. 그리고 연애 개그가 보여주는 연애의 ‘쌩얼’이 바로 연애의 정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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