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대잔치와 백구의 대제전을 보려 설렘과 걱정으로 계단을 올랐었네… 조성원도 은퇴하고 김현준도 갔지만, 올해는 한번쯤 농구장을 찾아볼까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찬바람이 불면, 설레곤 했다. 지루한 여름이 지나고 신나는 겨울이, 농구 시즌과 배구의 계절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장충체육관 키드였다. 1980년대 시작된 농구대잔치와 백구의 대제전의 주무대는 장충체육관이었다. 빅게임을 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달려와 장충체육관 계단을 올라가면서 느꼈던 설렘은 아직도 짜릿하다. 혹시나 매진이 됐으면 어쩌나, 행여나 우리 편 관중이 적어서 응원이 밀리면 어쩌나, 계단을 오르면서 만 가지 걱정이 교차했고 설렘과 걱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낯익은 암표장사 아줌마 아저씨가 계단에서 “매진이야”라고 말하면, 어찌나 허탈했던지. 그래도 대개는 기어코 암표를 사서라도 경기를 보았다. 물론 독서실 간다 하고 농구를 보러 갔다가 누나에게 걸려서 ‘협박’을 당한 적도 있다.
축구의 불합리성을 어찌 용납하랴 농구를, 배구를 편애하는 이유가 내게는 명확했다. 90분 내내 밀리다가도 한 번의 역습으로 1 대 0 승리를 하는 축구의 불합리성을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었다. 열 번 슈팅을 해야 한 골 터질까 말까 한 축구의 낮은 확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매력으로 보였을 축구의 의외성이 내게는 치명적인 결점으로 보였다. 그에 견줘 30초(이제는 24초) 내에 림을 맞히지 않으면 공격권을 뺏기고, 양쪽 코트를 정신없이 오가면서 공격과 수비가 끝없이 바뀌는 농구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였다. 그리고 농구는 경기 내용이 승부의 결과로 이어지는, 잘하는 팀이 승리하는 확률의 스포츠였다. 나는 확률의 게임을 사랑했다. 그래서 농구에서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경기는 드물지만,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경기는 한편의 드라마다. 야구는 지루했다. 투수가 결정적 한 구를 던지기 위해 끄는 시간이 내게는 긴장감이 아니라 지루함으로 다가왔다. 가끔은 야구를 이렇게 비하했다. “배 나온 선수가 잘하는 종목이 무슨 스포츠냐?” 그에 견줘 수직운동을 하는 배구선수들의 몸은 유니폼에 가려져도 아름다웠다. 빨랫줄 같은 토스를 받아서 벼락 같은 스파이크를 내리꽂을 때, 활처럼 휘어졌다 나비처럼 내려앉는 공격수의 몸놀림에는 감동마저 있었다. 배구의 아름다움은 카메라에 온전히 잡히지 않아서 경기장에서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배가됐다. 나의 첫사랑은 여자농구와 여자배구였다. 박찬숙이 뛰었던 태평양화학 여자농구단, 박미희가 활약했던 미도파(나중에 대농) 배구단은 추억의 목록에 첫 번째로 새겨져 있다. 박찬숙 때문에 태평양을 응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박찬숙이 은퇴하고 태평양 농구단이 중위권을 헤매자 이상한 종류의 집착이 생겼다. 특별히 한쪽을 응원하지 않아도 최경희의 동방생명 대 신기화의 국민은행 경기는 언제나 박진감이 넘쳤다. 더구나 입장권 한 장을 끊으면 서너 경기를 보는 호시절이었다. 삼성전자 대 현대전자의 경기를 보고 나서, 동방생명 대 국민은행의 경기를 연이어 보는 행운도 누렸다. 최신작의 동시상영 같은 기회였다. 이런 즐거움은 프로농구, 프로배구가 시작되면서 사라졌다. 박미희는 배구의 달인이었다. 작은 키를 영리함으로 극복하고 세계적인 센터로 군림했던 박미희의 지적인 플레이를 결코 박미희 이후에는 보지 못했다. 여자농구 한국과 중공(중국이 아니었다)의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ABC대회라고 불렀다) 결승전, 여자배구 한국과 일본 경기는 새벽별 보기 운동을 해서라도 기어이 보아야 했다. 보지 못하면 한 주는 스스로를 저주했다. 진월방, 정하이샤, 2m가 넘는 ‘중공의 마녀들’이 코트에 등장하면 선수들 못지않은 긴장감을 느꼈다. 한국이 중공을 이기고, 일본을 꺾으면 정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그토록 진심 어린 탄성은 이후에도 지어본 적이 없었다. 영원히 기억될 키작은 조성원의 레이업 이상하게 뇌리에 오랫동안 각인된 장면도 있다. 90년대 초반, 당시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던 김유택을 앞에 두고 캥거루처럼 뛰어올라 레이업(이제는 페니트레이션)을 성공시키던 키 작은 조성원의 유연한 몸놀림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특별히 명지대를 응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다른 경기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조성원의 레이업을 봤을 뿐인데, 20년 가까이 지났건만 그 장면은 잊히지 않는다.
조성원이 아무리 3점슛을 많이 넣어도, 단 한 번의 돌파만 내게는 남았다. 그랬던 조성원이 은퇴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나의 팀이었던 삼성전자의 에이스 김현준은 어느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꽃미남의 이마에서 꽃이 스러지는 모습도 보았다. 배구와 농구를 통틀어 내게는 가장 반듯한 미남이던 문용관의 머리가 벗겨졌다. 문용관은 선수를 은퇴하고 한동안 중계화면에서 사라졌다. 2000년대 인하대 감독으로 돌아온 문용관을 보았을 때, 반갑고도 아쉬웠다. 차라리 다시 보지 말 것을, 첫사랑을 10년 만에 만난 심정이었다.
농구대잔치가 프로농구로 바뀌고, 백구의 대제전이 이름을 바꾸면서 열정을 잃었다. 세상에서 더 재미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도 아니었는데, 첫사랑과 서서히 멀어졌다. 정말로 그때는 봄날이 싫었다. 겨울이 끝나면, 이제는 무엇으로 사나, 아득해지곤 했다. 요즘엔 집에서 5분 거리에 프로농구 경기장이 있지만, 한 번도 가지 않는다. 해마다 올 시즌에는 한 번쯤 하다가 겨울이 지나가버린다. 프로농구 19일 개막한다. 올해는 한 번쯤!
꽃미남 문용관은 어느새 중견 감독이 되었고(맨 왼쪽), 뱅크 슛의 달인이던 김현준은 어느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장충체육관 키드의 20년은 그렇게 흘렀다.(연합/ 신영근 기자/ 김영철 기자)
축구의 불합리성을 어찌 용납하랴 농구를, 배구를 편애하는 이유가 내게는 명확했다. 90분 내내 밀리다가도 한 번의 역습으로 1 대 0 승리를 하는 축구의 불합리성을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었다. 열 번 슈팅을 해야 한 골 터질까 말까 한 축구의 낮은 확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매력으로 보였을 축구의 의외성이 내게는 치명적인 결점으로 보였다. 그에 견줘 30초(이제는 24초) 내에 림을 맞히지 않으면 공격권을 뺏기고, 양쪽 코트를 정신없이 오가면서 공격과 수비가 끝없이 바뀌는 농구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였다. 그리고 농구는 경기 내용이 승부의 결과로 이어지는, 잘하는 팀이 승리하는 확률의 스포츠였다. 나는 확률의 게임을 사랑했다. 그래서 농구에서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경기는 드물지만,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경기는 한편의 드라마다. 야구는 지루했다. 투수가 결정적 한 구를 던지기 위해 끄는 시간이 내게는 긴장감이 아니라 지루함으로 다가왔다. 가끔은 야구를 이렇게 비하했다. “배 나온 선수가 잘하는 종목이 무슨 스포츠냐?” 그에 견줘 수직운동을 하는 배구선수들의 몸은 유니폼에 가려져도 아름다웠다. 빨랫줄 같은 토스를 받아서 벼락 같은 스파이크를 내리꽂을 때, 활처럼 휘어졌다 나비처럼 내려앉는 공격수의 몸놀림에는 감동마저 있었다. 배구의 아름다움은 카메라에 온전히 잡히지 않아서 경기장에서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배가됐다. 나의 첫사랑은 여자농구와 여자배구였다. 박찬숙이 뛰었던 태평양화학 여자농구단, 박미희가 활약했던 미도파(나중에 대농) 배구단은 추억의 목록에 첫 번째로 새겨져 있다. 박찬숙 때문에 태평양을 응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박찬숙이 은퇴하고 태평양 농구단이 중위권을 헤매자 이상한 종류의 집착이 생겼다. 특별히 한쪽을 응원하지 않아도 최경희의 동방생명 대 신기화의 국민은행 경기는 언제나 박진감이 넘쳤다. 더구나 입장권 한 장을 끊으면 서너 경기를 보는 호시절이었다. 삼성전자 대 현대전자의 경기를 보고 나서, 동방생명 대 국민은행의 경기를 연이어 보는 행운도 누렸다. 최신작의 동시상영 같은 기회였다. 이런 즐거움은 프로농구, 프로배구가 시작되면서 사라졌다. 박미희는 배구의 달인이었다. 작은 키를 영리함으로 극복하고 세계적인 센터로 군림했던 박미희의 지적인 플레이를 결코 박미희 이후에는 보지 못했다. 여자농구 한국과 중공(중국이 아니었다)의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ABC대회라고 불렀다) 결승전, 여자배구 한국과 일본 경기는 새벽별 보기 운동을 해서라도 기어이 보아야 했다. 보지 못하면 한 주는 스스로를 저주했다. 진월방, 정하이샤, 2m가 넘는 ‘중공의 마녀들’이 코트에 등장하면 선수들 못지않은 긴장감을 느꼈다. 한국이 중공을 이기고, 일본을 꺾으면 정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그토록 진심 어린 탄성은 이후에도 지어본 적이 없었다. 영원히 기억될 키작은 조성원의 레이업 이상하게 뇌리에 오랫동안 각인된 장면도 있다. 90년대 초반, 당시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던 김유택을 앞에 두고 캥거루처럼 뛰어올라 레이업(이제는 페니트레이션)을 성공시키던 키 작은 조성원의 유연한 몸놀림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특별히 명지대를 응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다른 경기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조성원의 레이업을 봤을 뿐인데, 20년 가까이 지났건만 그 장면은 잊히지 않는다.
90년대는 대학 농구팀의 시대였다. 언젠가 고백했듯이 ‘빨간옷’은 원컨 원하지 않컨 나의 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