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와 절망을 가르는 ‘끝내기 버저비터’… 농구선수도 일생에 한번 경험하기 힘들어
1960∼70년대 아시아 최고의 농구스타였던 신동파(현 대한농구협회전무이사)씨는 타임머신을 타고 약 40년 전 까까머리 고교생 시절로 돌아갔다. 지금도 가슴 한켠에 생생하게 간직한 추억을 맛보기 위해서다. 시절은 휘문고 3학년 때인 62년, 장소는 서울운동장 테니스코트에 마련된 농구코트. 당시만 해도 실내경기는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라 농구시합은 흙먼지가 이는 마당에서 열렸다. 전국체전 서울시예선에 출전한 휘문고는 경복고와 결승전을 벌였다. 게임은 엎치락뒤치락 반전을 거듭하더니 종료 5초 전쯤 경복이 70-69로 앞섰다. 공의 소유권 또한 경복의 것이어서 승리가 확실시되던 순간이었다.
신동파가 경험한 ‘거짓말 같은 일’
이어 학생 신동파는 자신의 농구인생에서 전무후무한 짜릿한 순간을 경험한다. 경복이 휘문 진영에서 드로인한 공을 순식간에 뺏은 동료가 신동파에게 패스를 건네자 신 선수는 하프라인을 건너며 그대로 집어던졌다. 공은 한참 허공을 날더니 거짓말처럼 나무판자로 된 백보드를 맞고 골인됐다. 그 순간 경기 끝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지금의 버저비터(buzzer beater), 따져보면 ‘건(gun) 비터’가 될 것이다. 3점슛 제도가 없던 시절이니 휘문이 71-70으로 역전승해 우승을 차지했다.
신 전무에게 그것은 농구인생의 유일한 버저비터로 기록된다. 종료버저와 동시에 성공시킨 슛을 흔히 버저비터라고 말한다. 전후반 혹은 쿼터마다 적용될 수 있으나 진정한 버저비터는 경기종료 버저와 함께 승부를 결정짓는 슛이다. 신 전무의 회고다. “1∼2초쯤 남았다고 생각해 그냥 골대를 향해 던졌는데 바람에 공이 흔들리며 날아가더니 그게 들어가더라고. 당시 KBS 라디오에서 임택근 아나운서가 중계했는데 장안에 난리가 났어.” 다시 현재로 돌아와 2001년 2월19일. 애니콜프로농구 LG-SK전이 열린 창원체육관에서 신 전무는 자신이 40년 전에 경험한 일과 비슷한 장면이 눈앞에서 재현된 것을 보고 놀라야 했다. 82-83으로 한점 뒤진 LG의 4쿼터 마지막 공격 때 조성원이 넘어지며 패스한 공을 에릭 이버츠가 림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서리에서 그대로 던진 것이 신기하게도 백보드를 넘어 림을 튕기고 골인됐다. 기적의 3점 버저비터. 공이 들어간 줄도 모르고 있던 이버츠는 관중의 함성과 함께 조성원이 달려와 품에 안기고서야 일이 난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 찰나의 순간에 터진 버저비터는 리그 역사를 바꾼다. SK의 집요한 추격에 2위가 불안했던 LG는 다 진 경기를 이김으로써 SK를 2.5게임차로 따돌려 4강직행을 굳힐 수 있었다. 신 전무는 그날 이버츠의 버저비터는 확률 1만분의 1을 극복한 것으로 높이 평가했다. 1만분의 1이면 골프의 홀인원 확률. 결국 평생 한번도 경험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천하의 슛쟁이였던 신 전무도 평생 딱 한번 손맛을 보았을 뿐이다. 프로농구 최고의 슈터인 조성원도 “중학생 때부터 기억을 떠올려보았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끝내기 버저비터 경험은 단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1쿼터 종료 때 20m짜리 버저비터 등을 프로에 들어와 몇번 성공시켜본 정도라고 한다. 신 전무는 이날의 버저비터를 “이버츠가 같은 지점에서 슛자세를 잡고 수백번 던져도 안 들어가는 슛”이라고 단언하며 “버저비터도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며 이버츠처럼 성실한 선수가 행운도 잡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프로농구 출범 이후 가끔씩 터져
그래도 끝내기 버저비터는 프로농구가 97년 출범한 이후 가끔씩 나오는 편이다. 최근에만 이버츠를 포함해 김영만(기아), 전희철(동양)이 한번씩 짜릿한 버저비터를 경험했다.
미 프로농구(NBA)는 팀간 전력차가 크지 않은데다 워낙 박빙의 승부가 많아 극적인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때문에 레지 밀러(인디애나 페이서스), 빈스 카터(토론토 랩터스) 같은 스타는 한 시즌에 몇번씩 극적인 버저비터를 연출하곤 한다. 미국만의 특수한 상황일 것이다. 미국에선 버저비터를 ‘해일 메리’(Hail Mary)라고도 표현한다. 아베마리아와 같은 뜻으로 기도하는 심정으로 던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에서 희망을 그리며 공은 날아가지만 과연 얼마나 골로 연결됐을까.
한국에 프로농구가 도입되기 전의 버저비터는 기록문서로 정리된 것이 없다. 할 수 없이 그에 관한 일화와 추억을 더듬자면 농구인들의 아련한 기억을 빌릴 수밖에 없다. 사실 버저비터란 용어도 80년대 후반 전광판 시계와 버저를 연결하는 장치가 경기장에 설치되고부터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 이전엔 종을 치거나 화약총을 쏘아 경기가 끝나는 신호를 보냈다. 전광판이 없던 시절엔 달력처럼 분단위로 뒤로 넘어가는 종이를 보고 선수들은 뛰었다.
별난 버저비터도 많았다. 4점 뒤진 상황에서 버저비터가 가능할까. 실제로 있었다. 조승연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전무의 회고다. 조 전무가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감독으로 재직하던 농구대잔치 86∼87시즌 동방생명-코오롱전. 동방생명이 4점 뒤진채 시간은 불과 5∼6초밖에 남아 있지 않아 한번 공격으로는 도저히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동방생명의 최경희가 버저와 동시에 3점슛을 던지는 순간 코오롱 수비수가 최경희를 덮쳤다. 슛골인과 함께 반칙으로 인한 자유투 2개. 최경희는 한꺼번에 5점을 몰아넣어 코오롱을 절망에 빠트린 것이었다. 조 전무는 개인적으로 한번뿐인 버저비터 경험을 갖고 있다. 1966년 기업은행과 고려대가 벌인 종합선수권 결승전. 고려대 3학년인 조승연은 팀이 한점 뒤지고 있던 종료 1초전 하프라인을 넘으며 힘차게 공을 던졌다. 그대로 골인해 역전이었다. 당시 박한, 정광석이 함께 뛴 고려대는 12년 만에 종합선수권 패권을 탈환했다.
KBL 장내아나운서로 잠실체육관을 지키는 염철호(전 신용보증기금감독)씨도 버저비터에 관한 일화를 지금도 여럿 기억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투가 가른 승패 중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1956년 조치원에서 벌어진 종별농구대회 산업은행과 저축은행(제일은행 전신)의 경기이다. 저축은행이 한점 앞선 상황에서 종료 1초 전 산업은행의 황태석(현 부산방송해설위원)이 슛동작 때 상대반칙으로 자유투 2개를 얻었다. 그러자 저축은행은 “반칙이 아니다”라고 항의하다 결국 경기를 포기했다. 이유는 황태석의 무서운 자유투 솜씨에 있었다. YMCA 자유투대회에서 100개 중 92개를 성공시켜 우승한 선수가 바로 황태석이었다. 자유투를 못 넣는 요행을 바라보기 힘들자 아예 경기를 포기해버렸던 것이다.
만세를 부르다 패배한 적도
이겼다고 만세를 부르는 순간 패배한 적도 있다. 71년 중앙대와 연세대의 대학연맹전 때의 일화다. 연세대가 종료 3초전 최경덕(현 금호생명감독대행)의 자유투 2개로 앞서자 선수들이 백코트하며 이겼다고 환호작약했으나 중앙대 진영에서 날아온 역전 장거리슛을 맞고 믿기지 않은 역전패를 당했다. 버저비터는 이처럼 예상 못한 상황에서 불가능한 승리를 연출하는 까닭에 매력이 있다.
제아무리 슛동작이 빨라도 버저비터를 만드는 데는 최소 0.5초가 필요하다. 그러나 0.4초 만에 만들어낸 버저비터도 있었다. 지난해 종별농구대회 양정고와 광신고의 대결. 양정 선수가 종료 0.4초 전 아웃오브바운스한 볼을 잡아 던졌는데 골인으로 인정된 적이 있다. 최단공격시간 버저비터로 기록되지만 실제론 볼을 잡는 데만 최소 1초는 지나갔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90년대 연세대-기아자동차의 농구대잔치 결승전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연세대 김훈이 사이드라인에서부터 드리블을 치고들어가 버저비터를 성공시켰는데 딱 2.8초를 남기고 시작한 공격. 하지만 기아의 강동희가 그 지점에서 전속도로 달렸는데도 슛하는 데 3초가 걸려 납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시절엔 시간도 가끔 고무줄처럼 탄력있었던 모양이다. 버저비터는 농구의 역사를 그렇게 바꿔놓았다. 숱하게 환희와 절망을 교차시키면서.
권부원/ 경향신문 체육부 기자

사진/버저비터는 97년 프로농구 출범 이후 아주 간간이 나왔다. 평소에는 구경하기 힘든 장면이다.
신 전무에게 그것은 농구인생의 유일한 버저비터로 기록된다. 종료버저와 동시에 성공시킨 슛을 흔히 버저비터라고 말한다. 전후반 혹은 쿼터마다 적용될 수 있으나 진정한 버저비터는 경기종료 버저와 함께 승부를 결정짓는 슛이다. 신 전무의 회고다. “1∼2초쯤 남았다고 생각해 그냥 골대를 향해 던졌는데 바람에 공이 흔들리며 날아가더니 그게 들어가더라고. 당시 KBS 라디오에서 임택근 아나운서가 중계했는데 장안에 난리가 났어.” 다시 현재로 돌아와 2001년 2월19일. 애니콜프로농구 LG-SK전이 열린 창원체육관에서 신 전무는 자신이 40년 전에 경험한 일과 비슷한 장면이 눈앞에서 재현된 것을 보고 놀라야 했다. 82-83으로 한점 뒤진 LG의 4쿼터 마지막 공격 때 조성원이 넘어지며 패스한 공을 에릭 이버츠가 림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서리에서 그대로 던진 것이 신기하게도 백보드를 넘어 림을 튕기고 골인됐다. 기적의 3점 버저비터. 공이 들어간 줄도 모르고 있던 이버츠는 관중의 함성과 함께 조성원이 달려와 품에 안기고서야 일이 난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 찰나의 순간에 터진 버저비터는 리그 역사를 바꾼다. SK의 집요한 추격에 2위가 불안했던 LG는 다 진 경기를 이김으로써 SK를 2.5게임차로 따돌려 4강직행을 굳힐 수 있었다. 신 전무는 그날 이버츠의 버저비터는 확률 1만분의 1을 극복한 것으로 높이 평가했다. 1만분의 1이면 골프의 홀인원 확률. 결국 평생 한번도 경험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천하의 슛쟁이였던 신 전무도 평생 딱 한번 손맛을 보았을 뿐이다. 프로농구 최고의 슈터인 조성원도 “중학생 때부터 기억을 떠올려보았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끝내기 버저비터 경험은 단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1쿼터 종료 때 20m짜리 버저비터 등을 프로에 들어와 몇번 성공시켜본 정도라고 한다. 신 전무는 이날의 버저비터를 “이버츠가 같은 지점에서 슛자세를 잡고 수백번 던져도 안 들어가는 슛”이라고 단언하며 “버저비터도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며 이버츠처럼 성실한 선수가 행운도 잡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프로농구 출범 이후 가끔씩 터져


사진/이겼다고 만세를 부르는 순간 버저비터 때문에 패배를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