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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 가을 다시 책을 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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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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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책을 곁에 두고 지내는 소설가·문학평론가·서평 기자들이 다시 읽고픈 책들…쓰디쓴 환멸이 밀려올 때마다 꺼내드는 시, 자꾸자꾸 창밖을 내다보게 하는 소설…

희미하지만 위협적인 그 소리


<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사크 지음, 김창활 옮김, 문학동네 펴냄

▣ 천운영 소설가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해온다면? 내가 만약 안락한 재벌가의 며느리이자 두 아이의 엄마라면?

아니 결혼도 하지 않고 잃을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그냥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여자라 치더라도. 처음 만난 남자의 이 말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늦어도 11월에는>은 처음 본 남자가 건네온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여자의 이야기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순간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 바로 그 죽은 여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그렇다고 그저 연애소설이라고만 할 수 없는, 정열적이면서 단호한 이야기.

사르트르로부터 “전후 독일문학의 대표작가”라는 극찬을 받은 한스 에히리 노사크는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질서와 독선을 부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연애소설의 한 극점을 보여준다. 그가 그려낸 연애 이야기 속에는, 한 사랑을 향해 돌진해가는 시린 열정 속에는, 생의 고독과 자아의 공허를 대면하는 차갑고 냉철한 시선이 들어 있다.

<늦어도 11월에는>은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한참을 서성이게 만드는 소설이다. 가을 무렵이면 또 어김없이 떠올라 심부를 들쑤셔대는 소설이다. 그것은 함께 있으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의 정열적인 사랑 때문은 아니다. 늦어도 11월이라는 기약이 이루어질지 아닐지 가슴 졸일 이유도 없었다. 그것은 주인공 마리안네와 베르톨트가 떠나는 마지막 장면의 긴 여운 때문이다. 가을이 지나고 약속했던 11월의 늦은 밤, 약속했던 폭스바겐을 타고 떠나는 연인들,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

늦은 밤 가로등이 어둠 속으로 꺾어지는 지점, 허공으로 날아오른 차. 그 속에 손을 꼭 잡은 연인들의 몸은 한없이 가벼웠으리라. 그 속에서 그들은 그의 휘파람과 그녀의 자장가 소리를 함께 들으며 행복했으리라.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순간, 고통은 사라지고 사랑과 행복이 완성되는 그 순간.

그리하여 나는 조급해지는 것이다. 11월이 다가오면, 자꾸자꾸 창밖을 내다보게 되는 것이다. 늦은 밤 창밖 가을 소리에 귀기울이며, 나를 불러내고 있을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그 소리는 먼 휘파람 소리처럼 자장가 소리처럼 희미하지만 위협적인 소리, 얼어붙은 내 마음을 쩍 하고 가르는 곡괭이질 소리이다.

기억과 다른 고향, 첫사랑

<생의 이면> 이승우 지음, 문이당 펴냄

▣ 전성태 소설가

독서 혹은 글쓰기는 생을 더듬어가는 여행이다. 인간의 생 앞에 마련돼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생 앞에 항상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존재이며 따라서 모든 소설은 성장소설인지 모른다.

이승우의 <생의 이면>(1992년 작, 1996년 개작)은 유년의 추억을 향유하기 위해 생을 되밟는 게 아니라 존재의 원형과 고통스럽게 대면하는 여로를 취하고 있다. 존재 이면에 숨어 있는 근원적 실체가 인간을 성장케 한다는 믿음에서 이 소설은 쓰여졌다. 이승우는 종교적 사유, 존재에 대한 성찰 등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25년 넘게 매달려온 중견작가다. <생의 이면>은 그의 독특한 문학세계가 형식과 내용에서 모두 가장 잘 발현된 작품이고, 이미 이 소설은 우리 문학을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로 눈 밝은 독자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생의 이면>은 박부길이라는 중견 작가의 과거사를 추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사코 입을 열지 않는 작가 탓에 화자는 그가 써온 작품들을 추적해 그의 생을 재구성한다. 작가 박부길의 성장기를 채우는 삶의 두 원형은 ‘고향’과 ‘첫사랑’이다. 이 두 원형은 지금까지 우리 문학 혹은 우리의 기억이 취급해온 방식과 다르게 제시된다. 고향은 안온한 곳인가? 작가 박부길에게 고향은 원죄 의식을 심어준 곳으로, 가고 싶지도 갈 수도 없는 곳이다. 아버지의 살해에 가담한 박부길은 아버지의 무덤에 불을 지르고 고향을 생의 금기로 남기고 떠난다. 많은 이들이 탈향을 감행한 우리 현대사의 일면을 상징화하는 것으로 보이며, 나아가 신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형이상학으로도 읽힌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고향이라는 실체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이후 박부길은 구원처럼 나타난 연상의 여인 종단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어 신학대생이 된다. 그러나 사랑이 결핍된 유년기를 보낸 박부길의 맹목성과 집착으로 첫사랑은 파국을 맞는다. 중년에 이른 한 인물의 어두운 성장기를 통해 작가는 인간 존재의 해결되지 않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운명과 구원, 신과 인간, 기억과 문학 그리고 사랑이라는 묵직한 주제가 내밀한 언어로 통합돼 있다. 자기 존재의 문제에 갈급한 독자에게 가슴 벅찬 길동무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아름다운 싸움을 위하여

<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광규 옮김, 한마당 펴냄

▣ 이명원 문학평론가

“나,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검은 숲의 출신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불쌍한 베. 베.’라는 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청년기의 비관주의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 비관주의는 기실 정처 없는 것이다.

자연을 상실함으로써 가능해진 대도시의 유년을 그는 불안의 감각으로 추억한다. “우리의 사정은 좋아질 거야.” 그의 시에서는 희망조차도 이렇게 막연하게 읊어진다.

대신에 절망의 바이브레이션은 깊고 풍성하다. “이 도시들로부터 남을 것은. 그곳을 가로질러 지나간 바람뿐이다.” 그뿐인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잠시 지나가버리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의 뒤에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쓰디쓴 환멸이 삶의 갈피에서 가엾은 폭죽처럼 한꺼번에 터질 때마다, 나는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곤 했다. 시인 김광규가 편역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통해서였는데, 브레히트의 이 시집은 반역이 아닌, 번역의 창조적 전파력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브레히트의 시는 번역의 침식을 잘 견뎌내는 시어들의 이야기성 때문에 술술 읽히면서도, 오래 음미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은 깊은 슬픔 속에서 스스로를 풍자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이를 읽는 독자 그 자신의 서늘하고 씁쓸한 삶과 별다를 것 없다는 동일시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 우리는 반대로 한 시대의 산문적 폭력성이 브레히트에서 멈추지 않고, 마뜩지는 않지만 역사의 변함없는 현재적 조건이 되었음을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변화를 위해 온몸으로 싸웠던 자는 ‘자연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겁한 침묵의 관찰자가 ‘자연사’를 기다리며 살아남는 일의 구역질나는 생존에 대해 비애를 느끼게 된다.

브레히트를 읽으면서, 나는 상처와 환멸, 패배감과 덧없음의 지옥을 통과한 자만이 세상과 깊이 있는 싸움을 벌일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곤 했다. 그렇게 모든 아름다운 싸움은 실제로는 이미 이긴다거나 진다거나 하는 표면의 일이 아니고, 마음의 안쪽에서 그 싸움 자체도 사실 무의미할 수 있음을 깊이 긍정한 자들의 치열함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부정의 형식으로 나타난 이 깊은 긍정이야말로 사실은 인간에 대한 넓은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지는 싸움도 때론 필요한 것이다.

젠체하지 말지어다, 소설가들이여

<보바리 부인>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오스카 와일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플로베르는 용빌 라베라는 시골에 사는 의사 아내의 천박하고 감상적인 연애담을 가지고 최고의 작품을 창조하고 문체의 걸작을 창조해냈노라고.

번역된 책으로 읽는 <보바리 부인>에서 문체의 맛을 깊이 음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열병에 빠져서 미친 듯이 자기 파멸을 향해 내달리는 마담 보바리의 모습을 손에 땀을 쥐고 읽어나가는 데는 번역본도 아주 쓸모가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보바리 부인>을 제대로 소화해내기 위해서는 초반부에 약간의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이것은 모든 불후의 명작들이 요구하는 바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펼쳐진 깊은 상징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앞장에 펼쳐진 고래에 관한 잠언들과 명구들로 이루어진 기이한 관문을 통과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또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 보여주는 참맛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먼저 파리에 관한, 그리고 파리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은 보케르 부인의 하숙집에 관한 장황하다 싶은 묘사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은 그것을 읽어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바리 부인이 사는 곳이 어떤 곳인지, 보바리는 어떤 내력을 거쳐서 이곳에 흘러들게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두도록 한다.

그러나 이 까다로운 것처럼 보이는 관문은 플로베르가 바야흐로 펼쳐 보일 숨막히는 흥미와 긴장을 위해서 지불해야 할 약간의 수고비일 뿐이다. 우리는 <보바리 부인>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무엇이고 인간을 관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많은 분들이 ‘보바리즘’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보바리 부인은 보바리즘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것은 몽환적이고 상상적인 자기를 꿈꾸면서 현실의 자기를 그것으로 대체해버리는 경향을 말한다. 그러니까 <보바리 부인>은 보바리즘에 의해 파멸돼가는 한 가련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으리라.

요즘 젊은이들은 서양 명작을 얼마나 읽는지 모르겠다. 필자에게 <보바리 부인>은 소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중요한 척도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 작품에 필적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 한 한국 현대소설은 여전히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별것 아닌 이야깃거리로 독자들의 시선이나 끌려 하면서 젠체하지는 말지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소설가님들이여.

그는 마침내 “다 이루었다”

<최후의 유혹>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백도기·장경애 옮김, 현대사상사 펴냄

▣ 임종업 기자 한겨레 출판팀 blitz@hani.co.kr

유신 말기, 대학 교정은 전경과 사복 형사들로 그득했다. 스무 살 초입 우리의 낮은 죽음처럼 음산했다. 저녁이 오면 막걸리집과 자취방은 담배 연기와 빈 술병으로 그들먹했다. 철학을 얘기하고, 시절을 얘기하고, 농촌과 공장을 얘기했다. 그리고 각자의 결심을 얘기했다.

로마 치하 유대 땅의 한 젊은이는 인생 대선배였다. 빼앗긴 산하, 뜨거운 바람에 마른 땅의 사람들은 더욱 마르고, 부역 지주와 종교인은 배부르고 성전의 제단은 희생동물의 피가 강처럼 흘렀다. 한국과 하등 다를 게 없었고 그가 거쳐간 번민과 고통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떡과 여인으로 배부를 수 있었고, 바벨론,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를 휘저을 수 있었으며, 마음만 먹으면 ‘신의 아들’로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의 아들’이 되어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애통해하는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의를 위해 핍박받은 자의 편에 서지 않았던가.

<최후의 유혹>은 기독교인들이 성경 속에 박제시킨 예수를 끌어내 피와 살이 도는, 역사 속의 인간 예수로 되살려놓았다. 우리는 소명 앞에서 겁먹고 떠는, 냉대와 불신 앞에서 당황하는,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한 유혹을 견뎌냈기에 그는 좁고 가파른 문을 지나 스스로 가난한 자의 빵과 냉수가 되었고 버림받은 자의 외투와 오막살이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머리 둘 곳 하나 두지 않은 채….

그리고 마지막 유혹.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라”는 로마 병사의 말. 아직도 늦지 않은 서른세 살 나이. 굳이 십자가의 ‘쓴잔’을 마실 것 없이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살아 고종명하는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유혹을 이겨냈기에 “다 이루었다”는 말로 생을 마칠 수 있었다. 그 한마디에 그의 서른세 해 전 생애가 압축돼 있다. 치열하게 살았기에 할 수 있는 말.

20여 년 만에 다시 읽는 <최후의 유혹>. 나사렛 시골뜨기 예수보다 열다섯 해를 더 살아남은 동안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자문이 뼈아프다. 또 젊은 시절 온갖 지적 편력을 거쳐 신의 참모습을 찾아낸 지은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모습이 보름달처럼 둥두렷이 떠오른다.

그와 함께 운명을 슬퍼해보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지음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올가을엔 윤동주를 읽자. 우리는 이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참 많은 일들을 해왔다. ‘국민시인’ 윤동주를 위해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의 시를 읽는 일.

윤동주의 비극은 국어 교과서에서 시작된다. 스물, 대학 입학, 잔치는 끝났고, 교과서는 불태워졌고, 윤동주는 떠나간다. 당신이 뒤늦게 시집을 샀다면, 다행이다. 이제 당신은 “가을로 가득 차 있는 하늘”을 보며 낭만적인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기대하지 않은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다. 시인의 얼굴은 창백하며, 목소리는 떨리고 분열돼 있다. 놀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대학교 3학년, 우연히 읽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서늘했다. 그의 시는 따뜻하거나 뜨겁지 않았다.

어느 날 시인은 아우에게 묻는다.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 하니?” 아우는 대답한다. “사람이 되려 하지.” 싸늘한 달에 젖은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인간이 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더욱 슬픈 것은, 그 불완전함을 안고 이 분열된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투르게네프의 언덕에 선다. 혁명적 지식인 투르게네프는 거지에게 가진 것을 몽땅 털어주고 거지의 손을 붙잡고 울었다. 그러나 시인은 거지 소년들에게 가진 것을 줄 용기가 없다. 소년들은 그를 흘깃 쳐다보고 지나갈 뿐이다. 손을 잡는 것과 흘깃 쳐다보는 것의 까마득한 거리. 이 거리는 시 ‘병원’에서도 나타난다. 시인은 병원 뒤뜰에서 일광욕하는 여자를 ‘훔쳐본다’. 가슴을 앓는다는 여자를 찾아오는 손님은 없다. 시인은 같은 아픔을 가진 여자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 그는 여자가 떠나고 나서야 여자가 누워 있던 자리에 누워본다. 시인은 투르게네프의 저 너머에서 우리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혹은 우리의 ‘근대적 주체’를.

시인은 어릴적 동무 ‘순이’의 세계를 늘 그리워했다. 그는 동시를 쓸 때 아마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이 불가능한 귀환이라는 것을 안다. 상실감을 가득 안고 그는 어떻게든 서로를 물어뜯는 근대를 버텨보려 했을 것이다. 올가을엔 윤동주와 함께 우리의 운명을 슬퍼해보자.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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