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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입장 번호표 1번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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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9-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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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샘으로 방청석 앞자리 얻으며 개그의 미래를 응원하는 개그쟁이 챔피언들…“지난번에도 왔었는데요, 직접 보는 게 몇 배는 더 재밌어요. 진짜 재밌어요!”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개그팬을 자처한 이들은 많다. 식사자리나 술자리에서 개그 프로그램 유행어 한두 마디 따라하거나 <개그콘서트> <웃찾사> <개그야> 등 방송 3사 개그 프로그램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얘기하는 모습은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개그팬은 많아도 개그쟁이는 많지 않다. 개그쟁이들은 개그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수준을 넘어 개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개그의 발전과 미래, 개그맨의 성장과 컨디션까지 신경쓰고 걱정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개그쟁이들은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경상남도에서 밤 기차 타고 올라왔지요


매주 수요일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공개홀 앞은 새벽부터 복작복작댄다. 새벽 3~4시 방송사를 지키는 이들은 입장 번호표를 받으려고 기다리는 <개그콘서트> 방청권 당첨자들이다. 등촌동 SBS 공개홀에 긴 줄이 서는 날은 매주 금요일이다. 이곳은 <웃찾사> 방청권에 당첨돼 한 자릿수 번호표를 고대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역사가 짧은 문화방송 <개그야> 녹화가 있는 화요일 여의도에 아직 이런 새벽 풍경은 없지만 인기가 더해질수록 아침잠을 포기하는 방청권 당첨자들이 늘고 있다.

개그 프로그램 녹화 현장에서는 개그맨들의 표정이나 연기가 TV화면 만큼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녹화 현장의 들뜬 분위기와 좋아하는 개그맨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수많은 개그쟁이들이 매주 방송국 공개홀 앞에서 새벽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다.

꼭두새벽 방송사에 달려오는 개그쟁이들은 사연도 가지가지다. 밤 기차를 타고 경상남도에서 올라와 새벽 3시부터 기다려 <개그콘서트> 번호표 1번을 받은 남자 고등학생들, <웃찾사> 1번 번호표를 받으려고 전날 저녁부터 12시간 넘게 진을 치고 기다린 여중생, 여자친구가 앞자리에서 보고 싶다고 했다는 이유로 하루 잠을 번호표와 맞바꾼 대학생 등. 잠도 못 자고 번호표를 받고 또 오후 6시 입장까지 시간을 죽이는 일은 보통의 체력으로는 불가능한 작전이다. 그래선지 체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10대부터 20대 초반의 청춘남녀가 보통 앞자리를 차지한다. 이들은 개그쟁이 중 체력만점 개그쟁이다.

이들이 고난의 행군까지 감행하며 앞자리에서 방청을 하려는 이유는 뭘까? <개그콘서트>와 <웃찾사> 방청을 다녀온 개그쟁이들에게 들어보자. “얼마나 여러 번 도전해서 얻어낸 방청권인데요! 한번 갈 때 확실하게 봐야죠!” “앞자리에 앉으면 카메라에도 잡히고 방청객과 함께하는 코너에도 참여할 수 있잖아요! 그런 기회가 어딨어요. 가문의 영광이에요!” “△△오빠 제일 가까이에서 보려고요! 꺄악!!” “지난번에도 왔었는데요, 직접 와서 보는 게 몇 배는 더 재밌어요. 진짜 재밌어요!”

몇 시간에 걸친 힘든 입장 과정을 거치고 이제 편안하게 즐기는 방청만이 남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입장을 마치면 이제 본격적인 박수 신공과 분위기 업 내공 훈련에 돌입한다. 훈련을 책임지는 이들은 <개그콘서트>의 변기수와 <웃찾사>의 조우용 등 각 개그 프로그램 개그맨 중 입담이 좋은 신인 개그맨들. 이들은 마이크를 잡고 무대 위에 올라와 30여 분간 적막을 깨부수는 수다와 계속되는 말걸기를 앞세워 방청객 마음의 문을 열어놓는다. 간단한 장기자랑 코너도 있다. 선물을 걸고 펼치는 이 장기자랑은 종종 본녹화를 압도하기도 한다. 대체 누가 개그맨이고 누가 방청객인지 모를 만큼 완벽하게 성대모사와 개그를 소화해내는 방청객들은 개그쟁이 중 제법 웃길 줄 아는 개그쟁이다.

박수 신공은 기본~ 내 얼굴 화면에 잡혔나?

마음의 문이 열리면 본격적인 녹화 무대도 열린다. 그날 녹화는 그날 방청객의 박수소리와 함성소리가 좌우한다. 웃음은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오고 개그의 힘은 준비된 방청객에게서 나온다는 옛말이 있지 않는가. 분위기만 좋으면 한 번 웃을 개그를 두 번 웃게 된다. 그러면 개그맨들은 한 번 웃길 개그를 두 번 웃기려고 노력한다. 손 떨리는 게 보이는 신인 개그맨들이나 노련한 중견 개그맨들이나 무대에 서면 긴장되긴 매한가지다. 이럴 때 손을 깍지 껴서 꼭 잡아주는 것은 쏟아지는 조명도, 눈을 부릅 뜨고 있는 PD도, 선후배 개그맨도 아니다. 무대 앞에 앉아 웃을 준비를 하고 있는 방청객이다. 개그가 진짜 아닐 때 냉정한 평가를 내려주는 이들도 방청객이다.

녹화 현장의 잔재미는 코너 시작 전 무대에 오르는 개그맨들의 모습과 가끔 나는 NG. 코너가 시작하기 전 “오늘 첫방인데 꼭 웃어달라, 통편(통째로 편집되는 것)만은 막아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개그맨부터 세트 뒤에서 마이크로 장난하는 개그맨, 코너 끝나고 춤출 때 제일 열심히 하는 개그맨까지 TV 방송 뒷모습을 볼 수 있다. 개그맨 한명 한명에 애정을 갖고 있는 팬클럽형 개그쟁이에게 이런 모습은 무대 위 연기만큼 소중하다. 2시간이 넘게 진행되는 녹화 내내 박수 치고 소리 지르면 손바닥과 목이 아프다. 녹화가 끝나면 마치 내가 연기라도 한 것처럼 허리가 뻐근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조명 꺼진 무대에 찾아가 좋아하는 개그맨에게 다가가 사인도 받고 ‘재밌었어요’ 한마디 해주는 것만은 빠트릴 수 없다.

집에 돌아가 몇 날 밤을 자고 나면 방송날이 온다. 녹화 준비를 하고 TV에 혹시 내 얼굴 나오지 않을까, 더 열심히 본다. 그러나 TV에서 자기의 얼굴을 확인하는 개그쟁이들은 많지 않다. 왜? 카메라는 미녀만 좋아하니까. 비록 자기 얼굴은 안 보이지만 그날 녹화현장의 박수소리와 웃음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면 당신은 진정한 개그쟁이다. 싸이가 예전에 <챔피언>에서 한마디 하지 않았는가. “진정 즐길 줄 아는 여러분이 이 나라의 챔피언입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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