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 그 뜨거웠던 해에 프랑스에서 쿠바까지 타올랐던 젊은 불길의 전모
1968년 어느 날 전후 소비사회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부르주아의 아이들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완전고용과 복지국가의 기적을 달성한 기성세대는 물질적 풍요 속에 자란 아이들이 자기들이 만든 그 잘난 체제를 왜 거부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체! 체! 체!”, “호 !호! 호!” 볼리비아에서 죽은 혁명의 순교자와 열대의 정글에 숨은 할아버지의 이름이 허공에 울려퍼지고, 그 아래로 이 젊은이들의 꿈을 칠한 붉은 깃발과 검은 깃발이 어지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너희의 꿈이 우리의 악몽이라면 “우리의 꿈은 너희의 악몽이다.”
그들은 ‘관계’를 바꾸려고 했다
이 피억압자의 축제를 우리는 80년대라는 이름으로 경험했다. 젊음을 저당잡힌 그 모든 어둡고 끔찍한 기억의 대가로 우리 세대만이 누리는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일생에 한번은 ‘국가’와 ‘체제’라는 것을 우습게 보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87년 거리에 나갔던 어느 후배는 그때를 “황홀했다”고 기억한다. 그 견고한 권력에 균열이 생기고, 공포의 탄압기구를 무장해제하고, 거리의 모든 시민이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는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체험. 이것이 아마 서구의 68과 우리의 80년대를 연결하는 공통점이리라.
하지만 모든 사회는 저마다의 시계를 갖고 있어, 우리의 80년대는 역사의 시간표 속에서 68년보다 외려 더 과거에 속한다. “CRS SS!!”(진압경찰은 나치친위대)라는 구호가 이 땅에서는 결코 ‘과장법’이 아니었다.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 고전적이어서 당시 우리에게 서구 젊은이들의 배부른 반항은 철없는 애들의 투정으로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실패로 끝난 그들의 혁명과 달리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우리의 반란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패배의 우울함을 안겨주는 68을 인용하기보다는 차라리 시간을 더 거슬러올라가 1917년 10월을 인용하기로 했나보다. 68은 제3세계에서 일어난 처절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아니었다. 서구적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곳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민족해방운동도 아니었다. 과거 제국주의 종주국의 좌파들에게 ‘민족’은 ‘파쇼’의 동의어였다. 그렇다고 민중운동도 아니었다. 혁명의 주력은 배부른 학생이었고, 배고파야 할 민중은 완전고용과 복지국가 속에서 불만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르노 공장을 점거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의 요구는 다른 데 있었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자.’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려고 했다. 여기서 68운동과 최근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탈근대의 사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이 드러난다. 가령 푸코는 권력을 억압이나 탄압의 물리적 기제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 이해하지 않는가. 68의 반란자들이 바꾸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인간관계를 조직하는 위계적, 권위주의적 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68운동의 과격한 거시정치적인 구호의 바탕에는 더 강하게 미시정치학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싸웠던 “권력”은 관계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그 폭력성을 구체적인 물리량으로 측정할 수 있는 압제와 탄압의 기구로서의 ‘권력’이었다. 문학적 형식으로 당시 현장을 스케치
맞서 싸우는 ‘권력’의 성격이 달랐기에 68운동은 우리의 80년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정치적 성격 외에도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측면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성의 해방, 여성해방, 소수자의 권리주장, 생태주의 사상, 나아가 히피나 아우토놈(Autonomen)과 같은 반자본주의적 아르스비벤디(생활양식)의 실험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반면 우리는 혁명이 가진 그 모든 풍부한 차원들을 모두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렸고, 또한 그래야만 했다. 그 결과 압제의 기구로서의 거시권력에 대항하는 가운데 우리 내부에 그 거시권력의 미시적 복제물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가령 학생운동권의 그 촌스런 ‘의장님’ 문화를 보라. 얼마나 권위적인가. 최근에 우리 사회에 등장한 ‘일상적 파시즘론’은 바로 이에 대한 적절한 반성으로 보인다. 이 미시정치학을 종종 거시정치학과 대립시키는 경향이 보이는데, 이는 한국과 서구의 상황의 차이를 보는 감각의 결여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68년 당시 서구에는 이미 튼튼한 좌파 정당이 존재했고, 68의 반란은 이 제도화된 기성좌파 정당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었다. 가령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봉급 몇푼 더 주는 조건으로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집으로 되돌려보내는 데 급급했고, 이 꼴을 보고 드골마저도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역시 프랑스의 공산당이야.” 그런데 우리에겐 다행히(?) 이런 애국적 공산당, 애국적 사회당조차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책으로 돌아가자.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장 타리크 알리와 프리랜서 수잔 왓킨스의 <1968>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서구, 체코와 폴란드와 같은 동구, 일본과 같은 아시아의 산업국가, 브라질, 멕시코와 같은 제3세계, 그리고 베트남과 쿠바에서 그 뜨거웠던 해에 동시에 일어난 거대한 사건의 전모를 마치 영화처럼 단편, 단편 몽타주하여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68의 원인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도, 그것이 추구했던 가치에 대한 철학적 연구도, 그것이 초래한 결과에 대한 정치학적 연구도 아니다. 르포르타주와 같은 문학적 형식으로 68의 젊은이들의 투쟁을 현장중계하듯이 스케치하며, 다분히 감상적인 시적인 어조로 68의 젊은이들이 꿈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뿐이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당시 파리의 길거리에 쓰인 낙서다. 68운동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현실주의적으로” 68운동은 성공을 했다. 서구사회가 오늘날처럼 권위주의를 벗고 유연해진 것은 바로 이 불가능한 것을 요구했던 혁명의 현실주의적 효과다. 베를린 한글학교의 아이들이 선생인 나를 ‘너’(du)라고 부를 때, 열대여섯 먹은 애들이 내가 듣는 옆에서 자랑스레 첫 성경험을 얘기하며 히히거릴 때, 나는 그 혁명의 효과를 현실주의적으로 느꼈다. 우리의 80년대는? 우리 역시 불가능한 것을 요구했다. 그 요구의 좌절로 우리가 얻은 현실주의적 효과는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아직 68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젊은이들은 사유의 능력은 어린데, 사고방식은 겉늙었다.
진중권/ 자유기고가

사진/1968년 10월, 올림픽이 열렸던 멕시코에서 학생들이 체 게바라 사진을 앞세우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무장으로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였다.

사진/히피 머리를 한 청년이 징병 소집장을 태우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는 저마다의 시계를 갖고 있어, 우리의 80년대는 역사의 시간표 속에서 68년보다 외려 더 과거에 속한다. “CRS SS!!”(진압경찰은 나치친위대)라는 구호가 이 땅에서는 결코 ‘과장법’이 아니었다.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 고전적이어서 당시 우리에게 서구 젊은이들의 배부른 반항은 철없는 애들의 투정으로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실패로 끝난 그들의 혁명과 달리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우리의 반란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패배의 우울함을 안겨주는 68을 인용하기보다는 차라리 시간을 더 거슬러올라가 1917년 10월을 인용하기로 했나보다. 68은 제3세계에서 일어난 처절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아니었다. 서구적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곳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민족해방운동도 아니었다. 과거 제국주의 종주국의 좌파들에게 ‘민족’은 ‘파쇼’의 동의어였다. 그렇다고 민중운동도 아니었다. 혁명의 주력은 배부른 학생이었고, 배고파야 할 민중은 완전고용과 복지국가 속에서 불만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르노 공장을 점거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의 요구는 다른 데 있었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자.’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려고 했다. 여기서 68운동과 최근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탈근대의 사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이 드러난다. 가령 푸코는 권력을 억압이나 탄압의 물리적 기제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 이해하지 않는가. 68의 반란자들이 바꾸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인간관계를 조직하는 위계적, 권위주의적 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68운동의 과격한 거시정치적인 구호의 바탕에는 더 강하게 미시정치학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싸웠던 “권력”은 관계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그 폭력성을 구체적인 물리량으로 측정할 수 있는 압제와 탄압의 기구로서의 ‘권력’이었다. 문학적 형식으로 당시 현장을 스케치
![]() 사진/1968년 2월 미국 웰슬리대학 학생자치연합 선거에 나서 당선된 힐러리 로드햄(가운데). 당시 대학생이었던 힐러리는 1969년 졸업식에서 학생대표로 연설을 한다(위). |
![]() 사진/1968년 9월에 열린 미스아메리카 경연대회를 반대하는 시위 도중 한 여성이 피켓을 세워 놓고 잠시 쉬고 있다.(아래) |
맞서 싸우는 ‘권력’의 성격이 달랐기에 68운동은 우리의 80년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정치적 성격 외에도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측면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성의 해방, 여성해방, 소수자의 권리주장, 생태주의 사상, 나아가 히피나 아우토놈(Autonomen)과 같은 반자본주의적 아르스비벤디(생활양식)의 실험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반면 우리는 혁명이 가진 그 모든 풍부한 차원들을 모두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렸고, 또한 그래야만 했다. 그 결과 압제의 기구로서의 거시권력에 대항하는 가운데 우리 내부에 그 거시권력의 미시적 복제물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가령 학생운동권의 그 촌스런 ‘의장님’ 문화를 보라. 얼마나 권위적인가. 최근에 우리 사회에 등장한 ‘일상적 파시즘론’은 바로 이에 대한 적절한 반성으로 보인다. 이 미시정치학을 종종 거시정치학과 대립시키는 경향이 보이는데, 이는 한국과 서구의 상황의 차이를 보는 감각의 결여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68년 당시 서구에는 이미 튼튼한 좌파 정당이 존재했고, 68의 반란은 이 제도화된 기성좌파 정당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었다. 가령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봉급 몇푼 더 주는 조건으로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집으로 되돌려보내는 데 급급했고, 이 꼴을 보고 드골마저도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역시 프랑스의 공산당이야.” 그런데 우리에겐 다행히(?) 이런 애국적 공산당, 애국적 사회당조차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