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비워두는 것만으로 준비된 작은 장소가 주인의 ‘아우라’ 만들어…‘소품’과 ‘자연’ 활용해 쓸모 따지기보다 본질에 다가서는 담담한 연출을
▣ 김주원 (주)이몽기가 대표 jwkim@imgg.co.kr
바야흐로 웰빙시대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삶의 질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공간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새집증후군 퇴치법 같은 초보적 단계의 웰빙 공간부터 느린 삶과 정제된 정신을 고양하는 경지에 이른 공간까지, 집은 이제 단순히 살기 위한 기계가 아니다.
집을 바라보는 시각은 참 여러 가지다. 집을 자산으로 보는 경우라면 투자 유망한 집이 가치 있는 집일 것이고, 아파트 광고에 흔히 등장하듯 ‘그곳에 사는 것이 당신의 자부심이 될 수 있는’ 것은 집이 신분상승 욕구의 대상이 되는 예이다. 그렇다면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집은 어떤 집일까. 삶의 질을 위해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지금이지만, 모든 것 훌훌 털고 떠나기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선택이다. 도시를 떠나지 않고도, 내 삶의 기본틀을 바꾸지 않고도 삶의 질에 쏟는 내 관심이 무안하지 않을 정도의 공간적 해결법이 우리 집에 있을까. 답은 ‘있다’ 쪽이다. 예전의 삶에도, 지금 우리 삶에도. 최부자집의 사랑방, 모로코의 리야드 부자가 삼대를 넘기기 힘들다고 하는데, 500년을 넘게 이어온 경주 최부잣집의 가훈 중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과객을 대접하는 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게 하라. 실제로 최부잣집에서는 과객 누구에게라도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으며, 과객을 대접하기 위한 곳간과 하인을 별도로 두었을 정도로 연중 이 집에는 손님들로 넘쳤다고 한다. 딱히 정한 바 없지만, 누구를 위해서라도 ‘비워져 있는’ 수많은 방들의 효용을 볼 수 있다. 또한 주인이 기거하면서 손님에게 개방돼 있는 ‘사랑방’ 문화는 오늘날의 거실과는 사뭇 다른 용도를 보여준다. 이런 공간들은 확정적인 용도와 쓸모보다는 비워지고 열려 있다는 것으로 그 효용이 빛을 발한다. 요즘 모로칸 스타일이 유행이다. 온갖 스타일의 혼성적 사용에 이어, 좀더 이국적인 취미를 좇는 세태를 반영하듯 언제부터인가 모로코가 최고의 인기 지역으로 부상 중이다. 나는 스타일보다는 이 지역의 독특한 생활습관에서 비롯된 ‘리야드’라는 공간에 관심이 간다. 우리나라 사랑방과 행랑을 합해놓은 듯하다.
모로코 사람들은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손을 잡아끌어 이 공간으로 들어오는 일이 잦으며, 행인이라도 리야드로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말인즉슨, 손님은 알라신이 보내주는 선물이기 때문에 반갑게 맞아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이 이들의 전통이다. 모로코인들은 리야드라는 공간을 통해 언제든지 선물 받을 준비를 하는 셈이다. 리야드라는 모로코의 독특한 공간문화는 그 전통의 흔적이며, 현재도 남아 있는 그들의 일상이다.
리야드는 누구라도 맞을 수 있도록 그저 비워두는 것으로 준비된 공간이다. 이런 공간의 존재는 계획에 없는 일들이 무수히 일어나는 인생에 여유를 가져다준다. 리야드는 내 일상의 중심이 되는 거실의 부속공간으로 존재하는데, 이런 공간의 존재는 누구라도 내 삶에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정신적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듯하다.
거실 옆의 부속공간으로서의 리야드가 아니라도, 사적인 취미실을 이와 같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거실과는 또 다른 성격의 누구에게나 개방된 사적인 공간이라는 개념의 서재, 가족실, 취미실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아우라가 느껴지는 수영장의 부처
요즘 하도 많이 써서 단어 선택에 고민이 좀 되긴 하지만, 이 말만큼 그것을 정확히 표현하는 용어도 흔치 않을 것이다. 아우라. 예술작품에서 느껴지는 그것만의 독특한 예술적 분위기를 뜻하는 이 단어를 집에도 적용할 수 있다. 아우라가 느껴지는 집은 좋은 집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집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다름 아닌 주인의 아우라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개인의 사적인 취미실에서, 다실이나 선방에서, 혹은 고도로 연출된 장면을 통해서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이다. 집주인의 정신에서 느껴지는 고갱이가 자연스레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집을 만나게 되면, 이런 파워풀한 공간을 만나게 되면, 그 소유주가 누구인지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공간이 교류의 매개가 되는 셈이다.
이런 공간들은 쓸모를 따지기보다는 본질에 다가선 단순한 공간의 연출인 경우가 많다.
본질에 다가선, 그래서 그것 이외의 것들은 담담하게 떨쳐낸 디자인은 사람을 편하게 한다. 편안한 가운데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비워냄으로써 더 많은 것을 채우는 역설로 존재하는 디자인이며, 우리 모두는 각자의 한계만큼 비어 있는 여백에서 무한의 서정과 지극한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은 수영장 한가운데 부처상을 앉혀놓은 것이다. 정원에 석물을 배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고요한 수면 위에 떠 있듯 앉은 부처상은 묘한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라면 수경을 착용해서도 안 될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이 수영장은 수영을 즐기기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마치 정원의 연못과도 같이, 잔잔한 수면을 보기 위한 수요소처럼 연출됐다. 이 정원에서 보여지는 평범한 것들이 석물의 배치 하나로 분위기는 반전되어 아우라가 느껴지는 비범한 공간으로 탈바꿈했고, 나는 저 정원의 주인에게 부쩍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또 다른 사진은 다실이다. 차 마시는 공간인데, 나뭇결이 느껴지는 묵직한 탁자를 놓은 것은 흔한 배치이다. 여기에 촛불을 끈으로 매달아 공중에 띄우는 장치를 통해 아우라를 담았다. 가뜩이나 바람 불면 휙 꺼질 듯한 이미지의 촛불이 아슬아슬하게 허공에 매달린 광경은 이 다실을 일순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저곳에서라면 정신의 날을 벼려 고요한 묵상의 세계로 쉽게 빠져들 듯싶다.
실내 자연요소, 관상용에서 체험용으로
도시 생활은 자연을 그립게 만든다. 곁에 없는 자연을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인공 자연을 만들거나, 자연을 연상시키는 장치를 통해 만족을 얻거나, 자연의 본질에 다가서는 인공물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는 등의 방법이다. 요즈음의 주거공간은 자연적인 요소를 세련되게 연출하는 것이 큰 트렌드 중 하나다. 예전에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그저 화분을 들여놓는다든지, 조금 더 나아가 발코니를 활용해 실내조경이나 실내분수 정도를 시도하는 정도였는데, 요즈음은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만큼 모사 자연의 연출 정도 역시 그리움의 크기만큼 커지는가 보다.
사진은 아파트라는 주거 형식에서 실내조경 등의 ‘보는 정원’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공간으로 구성한 쉽지 않은 경우다. 그곳을 통과해서만 거실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이 과감한 선택은, 대문에서 현관까지의 사이에 정원을 거쳐야 하는 단독주택에서의 프로세스를 아파트라는 공간에 도입한 것이다. 보는 정원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체험하는 정원이라는 발상이 신선하다.
또 다른 사진은 연못을 통째로 집안으로 들여온 듯하다. 고요한 수면이 이끄는 내면으로의 여행 속으로 쉽게 빠져들 것 같지 않은가. 이런 수공간이라면 이전의 실내분수처럼 똑같은 금붕어를 키운다 하더라도 분수의 주인이 금붕어로 느껴지지는 않을 듯하다.
실내공간에 자연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관상용에서 체험용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요소들은 실내공기를 정화한다든지, 습도를 조절한다든지 등의 소소한 효용을 넘어서는 쓸모가 있다. 그것은 정신을 고양시키며, 영혼을 어루만져 나를 부드럽게 변화시킨다. 공간은 사회적 관계에서 교류의 매개가 될 수 있다 했다. 공간의 주인에게 호기심이 느껴져 그와 교류를 시도하게 하는 것, 이것 역시 매우 유용한 공간의 효용이다. 이런 유의 공간이 주는 최고 경지의 효용은 역시, 다름 아닌 나 자신과 마주 보게 하는 것, 그래서 깊은 곳에 숨은 영혼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도와주는 것 아닌가 싶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투락레지던스’에 만들어진 부처 수영장. 정원의 연못같은 잔잔한 수영장이 ‘명상’을 연상시킨다(사진/ )
집을 바라보는 시각은 참 여러 가지다. 집을 자산으로 보는 경우라면 투자 유망한 집이 가치 있는 집일 것이고, 아파트 광고에 흔히 등장하듯 ‘그곳에 사는 것이 당신의 자부심이 될 수 있는’ 것은 집이 신분상승 욕구의 대상이 되는 예이다. 그렇다면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집은 어떤 집일까. 삶의 질을 위해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지금이지만, 모든 것 훌훌 털고 떠나기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선택이다. 도시를 떠나지 않고도, 내 삶의 기본틀을 바꾸지 않고도 삶의 질에 쏟는 내 관심이 무안하지 않을 정도의 공간적 해결법이 우리 집에 있을까. 답은 ‘있다’ 쪽이다. 예전의 삶에도, 지금 우리 삶에도. 최부자집의 사랑방, 모로코의 리야드 부자가 삼대를 넘기기 힘들다고 하는데, 500년을 넘게 이어온 경주 최부잣집의 가훈 중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과객을 대접하는 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게 하라. 실제로 최부잣집에서는 과객 누구에게라도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으며, 과객을 대접하기 위한 곳간과 하인을 별도로 두었을 정도로 연중 이 집에는 손님들로 넘쳤다고 한다. 딱히 정한 바 없지만, 누구를 위해서라도 ‘비워져 있는’ 수많은 방들의 효용을 볼 수 있다. 또한 주인이 기거하면서 손님에게 개방돼 있는 ‘사랑방’ 문화는 오늘날의 거실과는 사뭇 다른 용도를 보여준다. 이런 공간들은 확정적인 용도와 쓸모보다는 비워지고 열려 있다는 것으로 그 효용이 빛을 발한다. 요즘 모로칸 스타일이 유행이다. 온갖 스타일의 혼성적 사용에 이어, 좀더 이국적인 취미를 좇는 세태를 반영하듯 언제부터인가 모로코가 최고의 인기 지역으로 부상 중이다. 나는 스타일보다는 이 지역의 독특한 생활습관에서 비롯된 ‘리야드’라는 공간에 관심이 간다. 우리나라 사랑방과 행랑을 합해놓은 듯하다.

오른쪽은 김개천이 설계한 주택 ‘중암’. 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가운데에 공중에 매달린 촛불이 있다.

(사진/ )보는 정원에서 체험하는 정원으로. 단독주택에 흔히 있는 마당 공간을 적극적으로 실내에 수용했다

물의 공간을 통째로 집안에 들여왔다. 최시영이 설계한 ‘더 시티 세븐 자이 모델하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