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머리 나팔버지 시절로 돌아가는 후배가수들의 헌정공연, ‘이종환의 추억의 디스크자키-쉘부르’
여의도 문화방송의 10층 라디오국. 광활한 사무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이종환(64)씨를 찾으니 왼쪽 끝에서 초로의 신사가 일어난다. 기자가 건네받은 명함에는 ‘국장급 제작위원 이종환’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국장이라면 사무실 한가운데 떡 하니 놓여 있는 대형책상 앞에 일렬종대로 작은 책상들을 줄줄이 거느려야 마땅할 터인데 그의 자리는 외지고 책상은 마치 대기발령자의 것처럼 혼자 덩그러니 서 있다. 65년 이래로 라디오 마이크를 놓지 않은 현역 디제이 이종환씨의 책상이다.
지친 청춘들을 불러모으던 양치기
“입사동기들은 다 부하직원 수십명씩 거느리는 간부가 됐을 텐데 부러울 때 없으세요?” “간부요? 후배가 벌써 사장까지 했는걸요. 그런 사람들 하나도 안 부러워요. 요즘도 방송에서 말 잘못하면 사장실 가서 야단맞기도 하는데 난 그래도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내 영역을 갖는 게 더 좋아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디제이 이종환은 30∼40대들이 그들의 사춘기와 청년기를 회고할 때 한번쯤은 반드시 등장하는 이름이다. 어른들 앞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를 자랑삼아 노래하는 게 창피해지기 시작할 무렵 발견한 새로운 세계, 라디오에서 이종환씨는 짐지고 지친 청춘들을 불러모으는 양치기였다. 대학 시절 음악감상실 디제이를 하다가 문화방송의 콜을 받은 그는 65년 PD로 입사했지만 물을 만난 건 68년 신설된 <별이 빛나는 밤에>를 디제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면서부터다. 자정부터 한 시간 반 동안 진행한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당시 유행하던 팝송과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등 국내의 포크 가수들을 소개하면서 남진과 나훈아를 보고 자란 소년소녀들을 개명천지시켰다. 이씨 스스로도 이때를 “35년 방송인생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솟구친 <별밤>의 인기는 싱겁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다름 아닌 유신의 철퇴를 맞은 것. “밤에 아이들이 못 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심야방송이 폐지됐어요. 저도 물러나고 프로그램 성격도 명사 모시고 수업듣는 교양프로그램으로 바뀌었죠.” <별밤> 이후에도 <뮤직다이얼> <추억의 팝송> 등 음악프로그램뿐 아니라 <여성시대>, 지금하고 있는 <지금은 라디오 시대>까지 주부 대상의 AM프로그램도 꾸준히 진행했지만 기억의 회로 속에 디제이 이종환씨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로 남아 있다. 밤 10시 아코디언과 바이올린이 어울려 하이톤으로 시작하는 시그널 음악 <아듀 졸리 캔디> 위에 달콤씁쓰름한 커피맛의 목소리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라는 타이틀을 올려 놓으면 참고서 위에 머물던 수험생의 눈은 두 시간 동안 좀처럼 다음장으로 넘어갈 줄 몰랐다. 다른 프로그램들과 달리 이 프로그램에서는 빌보드 히트곡 다음에 나나 무스쿠리가 나오기도 했고, 모차르트의 오보에협주곡이 들리는가 하면 김동진의 <가고파>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매료시켰던 건 디제이 이종환씨의 목소리였다. 그는 때로 시낭송을 하기도 했고 한 시간 내내 에세이를 읽기도 했으며 가끔 청취자들을 따끔하게 야단치기도 했지만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디스크쇼가 새겨놓은 가슴속의 부조는 오래 남았다. 방송 당시 장난기 많은 젊은이들이 목에 한껏 힘을 주며 “이종환의∼ 디스크쇼”를 흉내내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으니 요즘 유행하는 개인기 성대모사의 원조뻘이 된 셈이다. 또 FM 최초로 만들어진 일요일 공개방송은 이문세, 이택림, 노사연 등의 가수를 인기 재담꾼으로 변신시키며 공개방송의 대유행을 낳기도 했다. 디제이로 더없이 바쁜 하루하루
40대들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 하나 더 있다. 이씨가 73년 종로에서 문을 열고 75년 명동으로 옮겨 운영한 ‘쉘부르’는 청바지와 통기타, 생맥주 등 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모인 명소였다. 이씨의 오디션을 거친 가수들은 정오부터 밤 10시까지 20분씩 라이브 연주를 했다. 양희은, 하덕규, 남궁옥분, 최성수 등 수십명의 가수가 이 쉘부르를 거쳐 스타의 길을 갔다. “남궁옥분이가 처음 쉘부르에 왔을 때 엉덩이까지 내려오던 생머리가 아직 눈에 선합니다. 주병진이는 가수하겠다고 왔는데 엠시를 해보라고 권유했죠. 그때는 가수들이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었어요. 참 인간적이었죠.” 쉘부르 시절 엄격한 불문율이 하나 있었는데 가수들끼리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젊은 또래가 많으니까 노래하는 가수들끼리 눈이 잘맞아요. 그러면 노래가 소홀해지기 십상이죠. 그래서 그것만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죠. 듀엣 한마음의 강영철, 양하영이나 몇몇 친구들은 눈맞아서 가게를 나가기도 했죠.”
그가 발굴해서 뜬 수십명의 가수 가운데 명절 때마다 인사오는 사람들은 이문세, 남궁옥분, 최성수 정도라고 한다. 섭섭하지 않냐니까 “세상이 그런 건데 뭐가 섭섭하겠어요”라고 답한다. 다시 쉘부르 같은 클럽을 해볼 생각은 없냐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요즘 젊은 친구들하고는 그때처럼 하는 게 불가능해요. 먼저 계산기부터 두드리니까.”
라이브 카페 쉘부르는 만들어지지 않겠지만 올 봄 쉘부르를 추억하는 가수들이 그를 위한 헌정공연을 준비한다. 4월 초 서울과 대전, 광주, 부산에서 열리는 ‘이종환의 추억의 디스크자키-쉘부르’는 잠시나마 장발머리에 나팔바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무대다. 쉘부르 출신의 가수들이 나와서 그 시절의 노래를 하고 이종환씨가 나와서 80년대 디스크쇼 공개방송을 진행했던 것처럼 가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씨는 늘 그랬던 것처럼 요즘 디제이로 더없이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문화방송에서만 <지금은 라디오 시대>말고도 지난해 10월부터 FM에서 새벽 4∼6시까지 <이종환의 음악세상>을 진행하고 있다. 또 매일 오전 10시부터 한 시간씩 미주 한인방송 통신원을 하고 있으며, 집에서 30분짜리 테이프를 직접 녹음해 인터넷 라디오방송(www3tv.co.kr)도 진행하고 있다. 새벽프로그램은 디스크쇼의 후신 같은 ‘이종환의 방송’이다. 선곡이나 목소리 톤, 방송의 짜임이 디스크쇼와 거의 흡사하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의 택시기사나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 같은 분위기와, <이종환의 음악세상>의 감성적 분위기를 한 사람이 동시에 만들어낸다는 게 쉽게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한다. “글쎄요, 뭐 특별히 준비를 하거나 연습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팔자라고 생각해요.”
“지겹다”고 하면, 그때가 정년퇴직
<이종환의 음악세상>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방송국 자료실에 좋은 음반이 그렇게 많이 쌓여 있는데 정작 라디오에서는 음악이 별로 나오지 않으니 너무 아까워서 졸랐죠. 찌그러진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방송하게 해달라고. 요즘 방송에서 가곡이나 클래식 소품 한곡 들을 수 있습니까?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노래도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래서 얻은 게 시청률이 가장 낮은 새벽시간대다. 이 프로그램의 호응이 높아져 다시 디스크쇼처럼 FM의 프라임시간대에 진입하는 게 육순을 넘긴 현역 디제이 이종환씨의 바람이다. “안 돼도 할 수 없죠. 그래도 이 나이까지 하고 싶은 것하며 살았으니 아쉽지는 않아요. 은퇴요? 청취자들이 이제 지겹다 들어가라 하면 그때가 정년퇴직입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디제이 이종환은 30∼40대들이 그들의 사춘기와 청년기를 회고할 때 한번쯤은 반드시 등장하는 이름이다. 어른들 앞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를 자랑삼아 노래하는 게 창피해지기 시작할 무렵 발견한 새로운 세계, 라디오에서 이종환씨는 짐지고 지친 청춘들을 불러모으는 양치기였다. 대학 시절 음악감상실 디제이를 하다가 문화방송의 콜을 받은 그는 65년 PD로 입사했지만 물을 만난 건 68년 신설된 <별이 빛나는 밤에>를 디제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면서부터다. 자정부터 한 시간 반 동안 진행한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당시 유행하던 팝송과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등 국내의 포크 가수들을 소개하면서 남진과 나훈아를 보고 자란 소년소녀들을 개명천지시켰다. 이씨 스스로도 이때를 “35년 방송인생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솟구친 <별밤>의 인기는 싱겁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다름 아닌 유신의 철퇴를 맞은 것. “밤에 아이들이 못 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심야방송이 폐지됐어요. 저도 물러나고 프로그램 성격도 명사 모시고 수업듣는 교양프로그램으로 바뀌었죠.” <별밤> 이후에도 <뮤직다이얼> <추억의 팝송> 등 음악프로그램뿐 아니라 <여성시대>, 지금하고 있는 <지금은 라디오 시대>까지 주부 대상의 AM프로그램도 꾸준히 진행했지만 기억의 회로 속에 디제이 이종환씨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로 남아 있다. 밤 10시 아코디언과 바이올린이 어울려 하이톤으로 시작하는 시그널 음악 <아듀 졸리 캔디> 위에 달콤씁쓰름한 커피맛의 목소리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라는 타이틀을 올려 놓으면 참고서 위에 머물던 수험생의 눈은 두 시간 동안 좀처럼 다음장으로 넘어갈 줄 몰랐다. 다른 프로그램들과 달리 이 프로그램에서는 빌보드 히트곡 다음에 나나 무스쿠리가 나오기도 했고, 모차르트의 오보에협주곡이 들리는가 하면 김동진의 <가고파>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매료시켰던 건 디제이 이종환씨의 목소리였다. 그는 때로 시낭송을 하기도 했고 한 시간 내내 에세이를 읽기도 했으며 가끔 청취자들을 따끔하게 야단치기도 했지만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디스크쇼가 새겨놓은 가슴속의 부조는 오래 남았다. 방송 당시 장난기 많은 젊은이들이 목에 한껏 힘을 주며 “이종환의∼ 디스크쇼”를 흉내내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으니 요즘 유행하는 개인기 성대모사의 원조뻘이 된 셈이다. 또 FM 최초로 만들어진 일요일 공개방송은 이문세, 이택림, 노사연 등의 가수를 인기 재담꾼으로 변신시키며 공개방송의 대유행을 낳기도 했다. 디제이로 더없이 바쁜 하루하루

사진/최유라씨와 함께 <지금은 라디오시대>를 진행하는 이종환씨. 구멍가게 아저씨같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새벽이 되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종환의 음악세상>을 이끌어간다.(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