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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간 다양성’을 보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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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9-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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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시대 이후로 소수민족들의 언어와 문화가 소멸될 위기에 처해 … 민족 분쟁의 시대에 과학은 다양한 민족집단에 대한 연구까지 포괄해야

▣ 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지난 몇 개월 동안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계 뉴스들은 대부분 대립과 갈등, 나아가 무력을 이용한 타 민족에 대한 공격으로 점철됐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사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민간인 학살, 그리고 영국에서 발각됐다는 항공기 납치 테러 기도 등의 사건을 접하노라면 과연 이런 일들이 진보된 문명 세계에서 버젓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가운데 서구 문명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야노마모족의 모습. 서구 학자들은 이들을 야만사회의 전형으로 묘사했다.(사진/ 연합)

물론 이런 사건들에는 복잡한 국가 간 이해관계의 정치경제학이 작용할 것이고, 역사가 시작된 이래 민족 집단들 사이의 갈등과 유혈 사태는 그치지 않았다.


현재 언어의 절반이 사라질 것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 이후 인종, 종교, 문화 등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데에서도 부분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속내를 살펴보면 석유, 영토 등을 둘러싼 무력 침략이 주된 이유임에도 마치 민족이나 종교의 대리전인 양 표방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수사(修辭)는 폭넓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어내곤 한다. 이것은 특정한 문화, 민족, 종교의 우월주의로 이어져 다른 문화나 종교를 배척하고, 심지어는 지배하려는 경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아직까지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확실하게 수립된 개념은 아니지만 ‘인간 다양성’(human diversity)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높이기 위한 폭넓은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 1992년에 유엔환경계획(UNEP)의 후원으로 채택된 생물다양성 협약은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속도로 멸종하는 생물종과 서식지 파괴와 같은 환경 파괴에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지금까지 190개국이 참여하는 큰 성과를 얻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3만여 종의 동식물이 멸종 위기에 처해있고, 해마다 1억 헥타르 이상의 서식지가 개간되고 있지만, 이 협약은 인류가 자신을 둘러싼 자연환경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무엇보다 생물종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매우 낮다. 특히 인간 다양성의 중요한 척도로 꼽히는 언어는 정확한 숫자도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상태이며 존재가 채 알려지기도 전에 민족 동화로 인해 사라져가기도 한다. 언어학자들은 현재 인류에게 6800개가량의 언어가 있으며, 그만큼의 민족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가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가령 시베리아 민족의 언어 중 하나인 유카기르어는 현재 사용자가 100여 명에 지나지 않고 사용자 대부분이 50살 이상의 고령자라서 두 세대 이내에 완전히 사멸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근대적 생활양식과 중앙정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고수하려는 민족들과 그들의 언어는 매우 위태로운 지경이다. 북아메리카의 코만치어는 겨우 부족의 1%만 사용하고 있다. 그것도 2차 세계대전에서 암호로 사용되면서 간신히 보전위원회를 만들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식민화와 그에 따른 민족 말살을 겪으면서 소수집단은 힘 있는 침략자들의 문화로의 동화를 강요받는다. 대개 첫 번째 희생물이 언어다. 일부 언어학자들은 21세기까지 현재 사용되는 언어의 절반이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기도 한다. 일주일에 두 개씩 자취를 감추는 셈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민족 간 갈등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집중해 있다. 여기에도 분명한 역사적 이유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16세기 이곳에 도착한 유럽 열강들은 자기들끼리 조약을 맺고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스페인은 중앙과 남아메리카 본토, 포르투갈은 브라질, 네덜란드와 프랑스 그리고 영국은 오늘날의 기아나, 영국은 카리브해 섬들을 차지했다.

식인종은 있었는가

영국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의 석학 로버트 윈스턴이 책임 편집한 방대한 저서 <인간>은 기구한 운명을 겪은 많은 민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트리니다드섬이 대표적이다. 17세기 말엽 스페인의 폭압적 통치와 그들이 옮긴 전염병은 원주민들을 거의 몰살시켰다. 그 뒤 이곳을 다시 접수한 영국은 설탕 농사를 지을 일꾼이 없자 토바고에 아프리카 노예를 들여왔다. 19세기 중엽에는 인도, 중국 등지에서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유입됐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인종 혼합이 이루어지면서 원주민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3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마리아나 제도의 차모로족도 비슷한 경우다. 1521년 마젤란이 이곳에 와서 ‘도둑의 섬’이라며 주민을 몰아내고 마을을 불태운 것을 시작으로 17세기 스페인의 식민지를 거쳐 독일과 일본에 점령당했고, 현재는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전통 문화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사냥의 제물이 되기도 했다.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 원주민을 향해 총을 쏘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형성 과정은 대부분 토착 민족집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럽의 식민지 분할의 산물이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민족 분포와 일치하지 않으며, 심한 경우 한 국가에 300여 개의 민족들이 포괄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국어 이외에도 수백 개의 지방 언어들이 함께 사용된다. 이러한 배경이 민족·문화 간 갈등을 야기하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4년 르완다에서 벌어졌던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유혈 사태이다. 이 과정에서 100일 동안 80만 명이 학살됐다.

얼마 전에 끝난 ‘월드컵’처럼 영향력이 높은 국가 대항 스포츠 문화는 이들 지역에서 민족적 정체성보다 국가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최근 ‘아프리카 네이션스컵’과 같은 국가 대항 경기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갈수록 민족 다양성이 힘을 잃어가는 추세이다.

동화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생활양식을 고수하는 민족에 대한 왜곡된 시각도 심각하다. 가령 아메리카 원주민 중에서 서구 문명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것은 야노마모족일 것이다. 그들은 워낙 오지에 살아서 1960년대에야 백인을 처음 접촉했다. 이 부족을 다룬 책이나 영화는 한결같이 이들의 폭력성과 호전성을 강조했고, 일부 학자들은 “야만 사회”의 전형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러한 해석이 서구인의 관점에서 편향된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 밖에도 식민지 침략자들에 강하게 저항했던 민족들은 예외 없이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으로 묘사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식인종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식민주의자들의 문화적 편견에 의한 가공물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두뇌계측학·지능지수·DNA 연구의 오류

지난 세기까지 ‘인간에 대한 과학’은 주로 두뇌계측학, 지능지수(IQ), 우생학 등 인간을 차별하고, 다른 민족이나 인종을 배척하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치우쳐왔다. 또 최근에는 DNA를 통해 인간을 분석하려는 경향이 과도해진 반면, 다양한 민족집단과 그들의 문화적 소산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이제 인간에 대한 과학은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특정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고 차별하려는 이데올로기를 해체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즉, 다양한 민족집단의 생물학적·유전적 특성과 아울러 그들의 언어와 문화, 생활양식을 이해하려는 노력까지 과학활동에 포괄해야 한다는 말이다. 생태계의 건강성을 위해 생물다양성이 요구되듯이 인류 문화가 건강하게 지속되려면 민족과 문화의 다양성이 유지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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