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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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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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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환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의사는 환자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는데다 그 과정에서 환자나 보호자와 교감을 갖다 보니 보통의 인간관계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된다. 고마운 마음을 조그만 선물로 표현하는 것을 ‘촌지’(寸志)라고 했던가? 하지만 우리에게는 촌지와 뇌물의 차이가 흐리고 촌지를 더 큰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 쓰던 때가 있었다. 아니 아직도 관가와 학교와 병원에 남아 있다. 촌지를 받는 학교 선생님이 있고, 수술을 빨리 받으려면 미리 촌지를 갖다바쳐야 하는 병원도 있다고 들었다. 강남의 엄마들이 전교조는 싫어하지만 전교조 선생님은 좋아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왜냐하면 전교조 선생님은 열심히 가르치고 촌지를 안 받기 때문이란다. 아직도 촌지가 있다는 얘기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지금도 환자를 소개해서 입원하게 되면 가끔은 수술 전에 얼마의 촌지를 주어야 하느냐, 그 선생님 포도주는 좋아하냐 등 의학 외적인 질문을 받기도 한다. 지금 그런 걸 바라는 의사는 없고 촌지가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친다고 설명해도 잘 납득하지 않는다.


전교조 선생님들이 촌지를 거절하고 학생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으로 낙인(?)찍혔다는 것은 전교조 운동이 성공한 운동이라는 방증이다. 촌지를 거절해서 더 유명한 의사도 있고, 모든 촌지를 거절해야 하고 정 거절할 수 없는 경우엔 그 촌지를 개인이 가질 수 없고 병원에 기부해야 하는 병원도 있다.

나는 별로 유명한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촌지를 주는 분도 적지만 그래도 가끔 들어오는 촌지를 거절하지 못할 때가 있다. 빨리 먹지 않으면 상할 음식을 갖고 온다든지, 넥타이를 건네는데 거절하면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참 난감하다.

자기 아들 암을 빨리 진단해서 고맙다고 꼬깃꼬깃 접어서 내 주머니에 집어넣은 돈 2만원, 나 때문에 인생이 재미없어졌다고(술, 담배 끊어서 사는 재미가 없어졌다는 뜻) 원성 아닌 원성을 하면서 술을 끊은 징표를 삼는다고 내놓은 마지막 남은 양주 한 병, 중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한국에 나올 때마다 들러 건강을 체크하고 약 처방을 받아가는 젊은 사업가가 내민 중국차… 이런 것까지 차마 내가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한번은 고혈압으로 진료를 받던 아주머니가 용인에서부터 메발톱꽃 20여 그루를 혼자서 들고 왔다. 이분은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버스와 도시버스를 갈아타고 다닌다. 전문적으로 농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집 정원이 넓어 취미로 꽃을 많이 키우는데 내 생각이 나서 외래 진료를 받으러 오면서 들고 왔단다. 나는 그분의 성의가 고맙기는 하지만 우리 집에 그것을 다 심을 공간도 없어서 5그루를 남기고 그날 저녁 연구회에 참석한 여러 병원의 동료 의사들에게 2그루씩 나누어주었다. 모두들 참 희한한 촌지를 받았다고, 저녁 늦게 들어가지만 이런 예쁜 꽃을 들고 가니 아내가 참 좋아하겠다고,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하면서 들고 갔다.

감사하는 말과 눈빛과 마음이면 충분한데 물건으로 표현하려는 것은 동서고금의 문화 현상일까? 정말 그렇다면 욕심이나 의도가 없고 감사와 정성만 담은 ‘촌지’면 좋겠다. 촌(寸)이 의미하는 정말 조그마한 선물 말이다. 더 좋은 것은 이런 촌지조차도 부담이 되거나 잘못 사용될 수 있으므로 다 모아서 바자회를 열고 그 수익금을 이웃을 위해 쓰는 병원, 학교, 공기관이 늘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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