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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흙 속의 진주, 여성국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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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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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전통 뮤지컬의 맥 잇는 여성국극 <견우와 직녀>…60년 역사 살려 가부키나 경극처럼 정부 차원 지원 모색해야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지난 7월(?)3일 공연 최종 리허설을 앞두고 대기실에 있던 ‘여성국극(國劇)’ <견우와 직녀> 출연진을 언뜻 봤을 때 남성미 물씬 풍기는 무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여성국극의 대들보라 불리며 ‘견우’로 분한 이등우씨의 곁을 지날 때에도 그랬다. 그 순간 “과연 남자 역할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리허설 무대에 오른 남장 배우들은 여성 국극이 추억하는 1960년대의 풍경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했다. 겨우 명맥만 유지한 채 1년에 한두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여성국극임에도 겹겹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성을 구별하기 힘든 목소리에 그대로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전후 60년대 초까지 전국 흔든 볼거리


“올해를 여성국극 중흥의 해로 정하고 신세대 국악인이 국극 무대에 많이 오르도록 했어요. 자칫 여성국극의 맥이 끊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높았거든요. 이번 공연이 끝나면 언제 무대에 오를지 모른다는 게 아쉽기 그지없어요.”

여성국극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 될 수는 없는가. 금강산의 전설을 담은 <견우와 직녀>는 여성국극의 새로운 성취를 예감케 했다.

여성국극 <견우와 직녀>의 연출과 작창을 맡은 홍성덕(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이사장)씨는 겨우 3일 동안 다섯 차례 무대에 올리는 공연에 사활을 건 듯했다. 선녀로 분한 배우들의 손동작 하나까지 신경을 쓰는 이유는 1960년대 초반 여성국극 <선화공주>를 보려고 전국의 공연장을 섭렵하던 시절의 감동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엔 한 치의 소홀함도 없으면 여성국극의 무대가 넓어질 것이라는 믿음도 깔려 있다.

사실 국내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국극만 한 볼거리는 드물었다. 전통예술평론가 강신구씨는 “여성국극이 극단 ‘신협’의 존재를 위협할 정도였는데 하나의 작품으로 1년여 동안 전국을 뒤흔들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때 앞서가는 무대기술이 여성국극을 통해 보급되기도 했다. 당대의 스타 임춘앵과 떠오르는 샛별들이 환상적인 조명 아래에서 애끊는 창과 우아한 춤을 선보일 때 탄성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성국극은 방송의 대중성을 따라가지 못했고, 영화의 재현성를 넘어서지 못했다. 게다가 전통국악의 틀을 깨뜨리려는 몸부림마저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면서 대중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어쩌면 여성국극의 시대는 한국전쟁 상흔기였는지도 모른다. 여성들에 의한 판타지가 시대의 우울을 달콤하게 녹여내는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기몰이를 하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국극단은 오히려 여성국극의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갈수록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졌고 국악인들조차 여성국극을 도외시했다. 그러다가 홍성덕씨가 1980년대 중반 서라벌국악예술단을 창립해 여성국극의 재도약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여성국극의 현실은 냉혹했다. 여성국극의 산실이던 명동의 시공관이나 청량리의 오스카, 마포의 도화극장 등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기도 힘겨운 현실이었다.

올해 <견우와 직녀>까지 해마다 여성국극 작품이 지속적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 가운데는 <황진이>처럼 세계 각국에서 공연하며 여성국극 ‘레퍼토리’ 목록에 오른 작품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가부키’와 중국의 ‘경극’이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성장할 때, 우리의 여성국극은 뜻있는 사람들의 쌈짓돈을 털어서 무대에 올려야 했다. 요즘 홍씨가 뮤지컬 열풍을 떠올리며 한숨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국극이 바로 우리식 뮤지컬입니다. 새로운 제작 시스템을 도입하지 못한 내부의 한계도 있지만 이제라도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연으로 키울 수 있는데….”

최근 신세대 국악인들이 여성국극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5월에 열린 제33회 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박복희씨가 이번 작품에서 직녀로 분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사실 소리(창)와 춤(무용), 극(연기) 등이 어우러진 여성국극에서 국악의 미래를 떠올리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2년 뒤면 순수 여류 명창들이 창극의 남성으로 분해 무대에 오른 지 60년이다. 이쯤 되면 여성국극을 어엿한 독립 장르로 여겨야 한다는 여성 국극인들의 바람이 부질없는 희망사항은 아니다. 여성국극 <견우와 직녀>를 통해 우리식 뮤지컬의 또 다른 진화를 예감하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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