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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미 FTA로 웃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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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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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릿하고 시원한 화장실표 카타르시스 풍자개그는 사라졌단 말인가 …“잘될 턱이 있나” “에구구, 오 신이시어” 요즘 상황에 딱 맞아라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살다 보면 자꾸 쌓인다. 위에는 음식물이 쌓이고, 머리에는 스트레스가 쌓이고, 마음에는 슬픔과 분노가 쌓인다. 쌓이면 쌓인 만큼 내보내는 게 자연의 섭리이면 삼라만상의 이치다. 먹으면 화장실에 가야 하고, 슬픔이 쌓이면 눈물을 흘려야 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땀을 흘려야 한다.

내보내지 못하면 ‘깝깝’하다. 화장실에 못 가면 깝깝하고 울지 못하면 깝깝하고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면 깝깝하다. 이렇게 깝깝하게 쌓인 것들을 한방에 내보내고 나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아, 시원~하다!” 이 시원함을 좀 있어 보이는 말로 ‘카타르시스’라고 한다.


회장님도, 탱자도, 네로도 없다

카타르시스의 관점에서 개그 프로그램은 국민 건강에 큰 기여를 한다. 한번 ‘지대로’ 웃고 나면 초강력 화장실 변기에서 물을 내릴 때 그 기분처럼 머리와 마음에 쌓인 정체 모를 감정들이 ‘하하하’ 웃으며 쓸려나가니 말이다. 눈물까지 나게 웃으면 효과는 두 배다.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개그는 뭐니뭐니 해도 풍자 개그다. 웃고 싶은 마음과 욕하고 싶은 마음이 손잡고 같이 뛰어나갈 때 느껴지는 짜릿함과 시원함은 풍자개그의 전매특허다. 웃어도 좋고 욕해도 좋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동전 줍는 일석이조, 일거양득의 개그라 할 수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풍자개그의 달인은 ‘영원한 회장님’이자 ‘우리들의 탱자’로, 지난 3월 세상을 떠난 김형곤이다. 백발의 김형곤이 ‘회장님, 우리 회장님’에서 정치인들을 비꼬며 ‘잘돼야 할 텐데’ ‘잘될 턱이 있나’ 하며 턱을 두 번 치면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TV 앞에서 시원해했다. 김형곤의 풍자개그는 눈치를 보지 않았고 ‘진짜’ 세상에 대해 얘기했다. 그래서 그의 풍자개그는 오랜 시간 시청자와 함께 웃을 수 있었다.

김형곤의 뒤를 잇는 풍자개그의 달인은 최양락이다. 최양락이 ‘네로 25시’에서 벼룩도 울고 갈 좀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에구구, 오 신이시어!” 하면 몇 번이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네로 25시’는 독재자 네로와 당돌리우스, 침묵리우스 등 그의 신하들이 왁자지껄 펼쳐놓는 현실 비틀기가 웃음의 핵이었다. 눈은 우스꽝스러운 네로를 보고 있었지만 사실 마음속에서는 웃어주고 싶은 현실 속의 인물을 보고 있었고 그들을 향해 깔깔 웃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최양락표 풍자개그를 선보이고 있다.

요즘은 개그 프로그램 전성시대다. 그런데 제대로 웃겨주는 풍자개그는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풍자개그가 살아 있던 <폭소클럽>도 막을 내렸다. 지금의 황금시간대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개그맨들이 풍자개그라고 내놓는 것들은 연예인이나 대중문화, 연인관계 등 쉽게 손에 닿는 소재들이다. 또 시청자에게 점수를 따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댓글 수준의 풍자개그, 쉽게 국민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일본에 관한 개그 등을 풍자개그라고 선보이기 일쑤다. 대체 뭘 풍자하고 싶은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예전에 정치풍자에만 머물렀던 풍자개그의 영역을 넓혔다고는 볼 수 있겠지만, 영역을 넓히면서 정치풍자는 자취를 감췄고 개그의 촉수로만 찾아낼 수 있는 소재들과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시선도 함께 사라졌다.

따끔하고 시원하게 한방 꼬집어주시라

물론 한미 FTA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개그맨도 없다. 한미 FTA가 방송계를 포함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 예상된다는 기사가 쏟아져나오고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에서 한미 FTA를 두고 몸싸움이 벌어져도 이 소재는 개그의 밥상에 올려지지 않았다. 한미 FTA에 대한 찬반 입장을 드러내라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이번 한미 FTA를 둘러싸고 국민적 합의가 있었는지, 대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미 FTA에 대해 왜 이렇게 혼란스러워해야 하는지에 대해 국민의 입장에서 따끔하게 꼬집어줄 수는 있지 않은가. 한미 FTA 협상을 바라보며 우리 속에 쌓인 수많은 분노와 스트레스를 시원한 웃음과 함께 한방에 날려줄 수 있는 개그를 기다린다.

“웃겨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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