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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형택의 서른, 잔치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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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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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토고전보다 더 매혹적이었던 랭킹 9위 휴이튼과의 5세트 접전 명승부… 아쉽게 패했지만 서브 최고 속도 200km 뽐내며 자신과의 싸움에서 멋진 역전극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최고의 승리는 아니지만 최고의 플레이였다. 지난 6월 말의 늦은 밤, 우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이형택의 모습을 보았다. 이형택 선수가 윔블던 오픈 2회전에서 레이튼 휴이트와 경기를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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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트였는데, 세트스코어가 1 대 1이었다. 스코어를 보니 1세트는 이형택이 타이브레이크 끝에 7 대 6으로 이겼고, 2세트는 2 대 6으로 내주었다. 오랜만에 이형택이 선전하네, 하면서 채널을 멈췄다. 다른 채널에서 보여주는 월드컵 경기를 ‘업무상’ 봐야 했는데, 이형택이 ‘하는 짓’을 보니 도저히 채널을 돌릴 수 없었다.


3시간17분, 흥미진진한 4세트 접전

당시 세계 랭킹 9위의 휴이트에게 랭킹 102위(현재는 97위로 올랐다)인 이형택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이런 경우 대개 톱랭커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접전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휴이트가 못해서가 아니라 이형택이 잘해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접전이었다. 이형택의 위닝샷(Winning Shot)은 예전보다 날카롭게 베이스라인을 파고들었고, 서비스는 한창 때보다 빨라 보였다. 휴이트가 멋진 샷을 날리면, 이형택은 더 멋진 샷으로 포인트를 따냈다. ‘오버 액션’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휴이트는 처음에 이형택의 위닝샷에 어이없다는 듯 거만한 제스처를 취하다가 위닝샷이 계속 이어지자 스스로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3세트에서 한 게임, 한 게임씩 주고받더니 마침내 타이브레이크. 정말로 이변이 눈앞에 있었다. 타이브레이크에서 6 대 3으로 리드하던 이형택은 마지막 한 방을 날리지 못하고 6 대 8로 역전당해 3세트를 내주었다. 이형택은 나중에 “공을 아껴서 졌다”고 돌이켰다. 공을 아끼지 않고 공격적으로 쳤다면, 이길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승부는 갈린다. 강자가 고전 끝에 승기를 잡았으니, 강자는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고 약자는 더욱 약해지기 십상이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이제는 축구를 봐야지, 하면서 채널을 돌렸다가 혹시나 하면서 다시 채널을 돌렸다. 이형택은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4세트에서 또다시 타이브레이크. 이번에는 이형택이 7 대 5로 이기면서 세트스코어 2 대 2, 타이를 이뤘다. 4세트까지 무려 3시간17분이 걸렸다. 일몰로 마지막 세트는 다음날로 미뤄졌다. 이형택은 마지막 세트에서도 선전했지만, 마지막 서브게임을 브레이크 당하며 4 대 6으로 패했다. 세트스코어 2 대 3, 정말로 아쉬운 패배였다. 월드컵 경기를 놓쳤지만, 새벽을 꼬박 새웠지만, 이형택의 경기는 그 정도 대가는 충분히 치를 만큼 아름다웠다. 나에게 ‘6월의 게임’은 월드컵 토고전이 아니라 이형택의 윔블던 2회전이었다. 하지만 이형택 필생의 경기는 월드컵에 묻혀 지나갔다. 이형택은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국에서 그렇죠 뭐…”라고 웃으며 답했다.

“지고도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솔직히 이형택은 저무는 선수라고 생각했다. 올해 서른의 이형택은 2000년 US오픈 16강에 들었다. 그것이 메이저대회 최고성적이었다. 2002년, 2005년 윔블던에서 2회전에 진출했지만, 서서히 저무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2000년 US오픈에서 이형택은 강호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16강까지 진출했다. 16강 피트 샘프러스와의 경기에서 패하고 악수를 하는 이형택.(사진/ AP 연합)

하지만 정말로 위대한 선수는 저물듯 저물듯 저물지 않는다. 앤드리 애거시는 언제나 최고는 아니었지만, 끈질기게 ‘클래스’를 유지하면서 안타까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애거시의 은퇴에 팬들은 눈시울을 적신다. 이날 이형택의 경기에는 쉽게 저물지 않는 선수의 비범함이 있었다. 단순한 시합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까지 담아내는 경기 말이다. 이날 이형택이 날린 서브의 최고 속도는 200km로 휴이트의 196km를 압도했다. 서른에 최고의 서브에 이르다니,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얼마나 멋진 역전극인가. 이형택의 소속팀인 삼성증권 윤용일 코치는 “서브가 오히려 좋아졌다”고 말했다. 서브뿐 아니라 샷도 이전보다 안정돼 보였다. 실제 휴이트와 경기에서 이형택의 위닝샷이 더 많았지만, 실책이 더 많아서 대어를 놓쳤다. 휴이트가 조금만 ‘덜’ 끈질긴 선수였어도, 이형택의 위세에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주원홍 삼성증권 감독은 “휴이트만 이겼으면 대진표상 8강까지 가는 경기”라고 아쉬워했다. 실제 휴이트는 8강까지 올랐다.

남자 골프에 최경주가 있다면, 남자 테니스에는 이형택이 있다. 이형택은 2000년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 대회 1승을 따냈고, 2003년에는 세계 랭킹 52위까지 올랐다. 이형택이 만든 한국 남자 테니스의 역사다. 주원홍 감독도 “형택이가 이룬 것이 너무 많다”며 “이제는 투어를 즐기면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2일 서울 올림픽공원 부근에서 이형택 선수를 만났다. 우선 3세트 타이브레이크에서 역전을 당하고 다리에 힘이 빠지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그는 이형택은 “그냥 포기하지 말자고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무언가 ‘독한’ 대답을 기대했던 기대를 배반하는 대꾸였다. 어떻게 다시 ‘회춘’했느냐고, 비결이 뭐냐고 물어도 “그렇게 상승세는 아니에요”라며 담담하게 답했다. 그는 오히려 “기술은 늘었을지 몰라도, 체력은 예전만 못하다”고 담백하게 말했다.

옆에 있던 윤용일 코치는 “아직도 후배들이 못 따라올 만큼 체력이 좋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그저 웃는다. 일몰로 경기가 연기되지 않았으면 상승세의 이형택이 이기지 않았을까, 다들 아까워했다. 그는 “솔직히 4세트가 끝날 때쯤 손목에 살짝 경련이 왔고, 몸이 무거웠다”면서 패배를 일몰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그는 나이에 대해서도 조바심치지 않는다. 그는 “이제는 체력이 떨어진다고 안달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에 최대한의 것을 끌어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 정상급 선수들과 맞서는 일에도 두려움이 없다. 그는 “그런 선수들하고 해서 져도 누가 뭐라고 안 하잖아요”라며 “오히려 공격적으로 치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나긴 투어 생활에 지치지 않으려면 “지고도 웃을 줄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형택 선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원홍 감독은 “동양 선수들은 한번 떨어지면 다시 올라오기 어렵다”고 말했다. 체격 좋은 서양 선수에게 끈질긴 리시브로 맞서야 하는 동양 선수가 나이 들어서도 기량을 유지하기란 몇 배로 어렵다는 말이다. 정말로 동양인 ‘남자’ 선수의 랭킹은 나누기 10을 해서 평가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100위라면 나누기 10 해서 10위, 이렇게 말이다.

‘물’오른 몸으로 두달간 US오픈 투어

이형택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윔블던 이전부터 상승세가 뚜렷했다. 윔블던 직전의 투어대회에서 세계 34위 선수를 이겼다. 그 이전에는 2006 부산오픈 국제남자챌린저 테니스대회에서 오랜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윔블던의 선전으로 랭킹도 다시 100위 안에 진입했다. 100위 안에 진입한 덕분에 8월부터 열리는 US오픈 본선에 직행한다. 다시 ‘물’이 오른 이형택은 14일, 두 달의 일정으로 US오픈 투어를 떠났다. 평소보다 길게 잡은 야심찬 일정이다. 서른, 잔치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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