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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춤의 ‘바깥’으로 눈을 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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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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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호 ‘우리 예술춤은 왜 공허한가’가 말한 ‘내재적 변화’에 대한 반론… 안은미의 <신춘향>과 정영무의 춤은 사회적·문화적 징후와 함께 이해돼야

▣ 김남수/무용평론가

<한겨레21> 616호(발행일 2006년7월4일)에 실린 이지현 무용평론가의 ‘우리 예술춤은 왜 공허한가’를 통해 읽으며 “삶과 춤을 사유하고 몸으로 철학하자”는 제안에 공감한다. 그는 안은미의 <신춘향>을 비판하고, 정영두의 <텅 빈 흰 몸>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평론가가 이 글에서 사유와 철학의 방법으로 제시한 구체적인 방향은 전혀 대안적이지 못하다.

안은미의 <신춘향>은 ‘동물-되기’의 몸, 통나무처럼 개시되는 몸을 보여줌으로써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넘어서고 있다.

아서 단토가 말한 “의미의 집적된 역사”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자는 것은 결국 우리 춤의 내재적 변화를 꾀하자는 것이다. 새로울 게 없는 현상 유지가 아닌가. 지금까지 우리 춤계가 걸어온 길 그 자체이며, 단지 춤의 고안을 통해 미적 체계를 풍부하게 하자는 것에 불과하니까. 이지현씨는 몸과 춤, 삶을 전제하면서도 실제 비평에서는 전혀 다른 가치판단을 보여주고 있다.


<신춘향>에 빛나는 치유의 진정성

가령 러시아 발레 <돈 주앙과 몰리에르>가 안정된 기반 위에서 “고전적 형식”을 지키고 있는 것을 칭찬한다. “생활 속의 춤”이란 이상한 강변을 하면서까지 그들이 오래도록 지속해온 몸의 결정론, 미의 형이상학을 결과적으로 지지하는 셈이다. 시대적 감수성에 따른 변화를 거부하면서까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적응한 발레의 유목화가 결국 몸의 제국주의로 나타난 현상에는 별 말이 없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포장지”로 갈아입으면서 가짜 낭만주의의 쾌적한 오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니까 이지현씨에게 몸으로 철학하기는 ‘움직임 체계’ ‘형식’을 꾸며가는 것이다. “의미의 집적된 역사”는 예술계 내부에 축적된 사회적·문화적 관습이다. 아서 단토의 ‘예술제도론’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예술의 의미와 가치가 제도권 내에서 결정됐다는 일종의 ‘패러다임’ 이론이지만, 그것이 자칫하면 모든 창작이 내부에서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이지현씨가 안은미나 정영두의 춤을 평하는 부분이 그런 우려를 보여준다.

서구인들에게 영합했다는 혐의를 두고 안은미의 <신춘향>을 단순한 오리엔탈리즘의 범주로 비판한다. 정작 그 무대 바닥에서 펼쳐지는 ‘동물-되기’의 몸, 통나무처럼 개시되는 몸은 보지 않고 있다. ‘고통의 문법’을 보지 않는다. <신춘향>이 동서양의 관객을 사로잡은 것은 그 바탕에 몸이 가진 물질적 아픔, 감각적 상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계 속에서 몸은 비로소 내밀한 몸이 되고, 그 몸이 예리한 고통을 느낀다는 인식이 있기에 이 작품은 치유의 진정성이 빛난다. <산해경>식의 상상 동물, <시경>의 복사꽃 아래 로맨스가 아시아적 문화 코드를 새롭게 팝아트의 정서로 보여주면서 보기 드물게 “몸으로 철학하면서 의미를 생산하는” 창작이기에 동서를 가로지를 수 있었다. 이지현씨는 몸·춤·삶의 입장에서 벗어나 단지 춤의 부분적 체계나 공연의 일부 요소에 집착하고 있어서 자기모순적이다.

촉망받는 젊은 안무가 정영두에 대한 평도 지나치게 탈색된 시각이다. 그가 몸을 집요하게 사용해 “지루하지만 신선”했고 “놀이는 초보적”이었다는 것은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단순한 인상비평이다. 주류 춤 평론에서 흔히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임시의 산물로 여길 때 저지르는 오류가 아닌가. 워크숍에서나 쓸 수 있는 언어가 실제 비평에 끼어든 셈인데, 이것은 빈곤을 자초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작품은 비평가의 내면을 거쳐서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생략돼 있다. 정영두의 작업은 움직임의 내재율을 추상적으로 찾아낸다기보다 이미 삶의 영역, 자본주의의 질서 속에 사는 몸이 사회적·문화적 징후들과 관련되면서 삶의 확장된 의미를 획득해내고 있어 고무적이다. 그에게 몸으로 철학하기는 몸이 ‘생활’의 지평 위에 있는 세계이다. 그가 ‘동시대성’이란 입장에서 자신의 고유한 창작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재현’이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현시’의 성격을 무시하게 된다.

지엽적인 부분에 콤플렉스 느끼지 말라

주체적 입장에서 작업하라는 제안은 좋지만, 내부로의 함몰이 그 결과여서는 곤란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내부의 자각과 함께 외부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 컨템퍼러리 댄스는 하나의 시사를 준다. 가령 얀 파브르의 <눈물의 역사>는 눈물 흘리는 능력을 잃어버린 휴머니즘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빔 반데키부스의 <순수>는 전쟁과 정글 자본주의를 총체적인 디스토피아로 그려낸다.

<돈 주앙과 몰리에르>는 전통적인 몸의 결정론, 미의 형이상학을 반복하고 있다고 김남수 평론가는 비판한다.

그 과정에서 무대 바닥에 유리 공예를 깔기도 하고, 철학 텍스트의 언어를 오브제화하기도 한다. 또한 폭력과 참화가 휩쓴 영상을 통해 우리의 부조리한 세계를 단숨에 요약한다. 내용과 표현에서 세계에 참여하며 발언하고 있다. 자율성이란 명목으로 고립된 영토를 지키기에 급급했던 우리 춤으로선 삶과 화해하고 몸을 자각하는 방편이 되지 않는가.

우리 춤이 공허해진 것은 ‘경지’나 ‘깊이’를 절대시하면서 춤의 안쪽에다 움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경지’나 ‘깊이’의 형이상학에 매달려 오히려 춤의 ‘쓰임’에서 의미가 나온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 속에 있는 몸에 어떤 힘들이 작용해 삶의 비극을 몰고 오는지, 그리고 반응적인 몸이 예리한 통각의 춤을 통해 거꾸로 삶의 뜨거운 긍정을 이뤄낼지를 고민하지 않은 것이다. 현실의 조건 속에서, 삶의 표면 위에서 춤추지 않고, 자족적인 ‘내면’으로 스스로 소외시킨다면 아무래도 우리 춤에는 미래가 없다. 유럽 컨템퍼러리 댄스의 현란한 무대 공학이나 영상 같은 지엽적인 표현에 콤플렉스를 느낄 이유가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지에서 길어올린 성찰 속에서 몸과 삶을 사유하고 몸으로 철학할 수밖에 없다. 그 전에 우리 젊은 무용가들은 이 세계와의 전면적인 관계를 회복하면서 춤의 바깥을 향해 눈을 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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