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나를 극한의 상황에 던져라”

347
등록 : 2001-02-21 00:00 수정 :

크게 작게

살아남아야 하는 시대, 영화에서 만화까지 범람하는 서바이벌 문화상품들

사진/조난과 생존을 그린 영화 <캐스트 어웨이>(맨위). 직장인들이 서바이벌 게임을 즐이고 있다.(정진환 기자)
“한 사람은 탈락되어야 합니다.”

여덟명의 얼굴이 굳어진다. 붉은 횃불을 둥글게 꽂은 동굴 안에서 투표는 시작된다. “좋은 사람이지만 할 수 없죠. 우리 중에서 제일 체력이 떨어지니까요.” “나는 여기에 게임을 하러 왔지, 사람을 사귀러 온 게 아닙니다.” 오늘의 추방자는 뎁, 뉴 햄프셔에서 온 소년원 간수다. “그래 어디 잘들 해봐요.” 무뚝뚝한 말을 남기고 그는 떠난다. 남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안도의 기색을 감출 수 없다.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랴?


이상은 케이블TV Q채널에서 수입해 국내방영중인 <서바이버2>의 한 장면이다. 이 프로그램의 룰은 간단하다. 16명의 미국인 남녀가 외딴 섬에서 살아간다. 두팀으로 나누어 일주일마다 한명씩 투표로 추방한다. 마지막까지 남는 자는 100만달러를 갖는다. 지원자 4만9천명 가운데서 뽑았다는 열여섯명의 참가자의 직업은 바텐더, 헬스 강사, 하버드 법대생 등 다양하다. <서바이버2>는 마지막회 시청자 5100만명이라는 수치를 기록한 <서바이버1>의 후속편이다. 이는 1987년 이후 여름기간중 미국 내 최고의 시청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바이버2>는 전체 15회로 구성돼 있는데, 2월20일 현재 미국에서는 4회까지 방영했고, 오는 5월6일에 마지막회를 방송할 예정이다. 미국과 6일 차이를 두고 방송하는 한국에서는 5월10일 마지막회를 방송한다.

서바이벌, 온통 서바이벌이다. 영화, 방송, 출판에서 만화까지 서바이벌 상품이 만연해 있다. 무인도에서의 서바이벌을 다룬 영화 <캐스트 어웨이>는 서울에서만 39만6천명의 관객을 맞이했다(2월14일 기준). 2시간20분의 대부분, 관객은 톰 행크스(척 놀랜드 역)가 불을 피우고, 물을 마시고,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봐야 한다. 출판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최근 문학세계사에서 펴낸 책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법>(죠슈아 피븐·데이비드 보르게닉트 지음)은 열쇠없이 차시동 거는 요령에서 성냥없이 불피우는 비결까지 가르쳐준다. 내용 중에는 ‘퓨마의 공격에서 피하려면’, ‘악어의 공격에서 피하려면’처럼 한국상황에서는 거의 쓸모없이 보이는 정보도 있다. 그러나 “살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저자의 충고성 협박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어치우기에 충분하다.

서바이벌 게임 역시 최근 들어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서바이벌 게임업체 IET를 운영하는 김용철 실장은 “예전에는 회사에서 극기훈련식으로 많이들 왔는데 요즘은 계모임이나 친목모임에서도 온다. 특히 여성고객이 늘어난 것이 특징이다. 뭔지 모르고 남편따라 왔다가 재미가 붙은 경우도 적지않다”고 말한다. 서바이벌 게임 마니아인 이아무개(34·남)씨는 “주로 서울 근교나 폐공장에서 허락을 받고 게임을 하는데, 여성들은 탈의실과 화장실이 마땅치 않아 난감할 때가 많다. 훈련이 없을 때 예비군훈련장을 게임장으로 유료개방하면 수익도 올릴 수 있고 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나 한다”고 말한다. 전국적으로 집계한 서바이벌 게임 인구통계는 없으나, 서바이벌 인터넷동호회 ‘건파워’의 경우 2만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현실과 놀이 사이에서의 딜레마

사진/서바이벌을 상품화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서바이버2>의 한 장면. 사진은 게임에 참여한 하버드 법대생 닉 브라운.
서바이벌 문화상품에도 딜레마는 있다. “어디까지 현실이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즉 현실과 놀이를 교묘하게 섞되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실에 너무 가까우면 인권유린의 소지가 있고 위험하다. 현실에서 너무 멀면 서바이벌이라는 의미가 없다. <서바이버> 시리즈 역시 그런 딜레마에 부딪혀 있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는 불을 피우기 위해 손바닥이 시뻘겋게 젖도록 피를 흘렸지만 실제상황에서 일반인들이 그렇게 하기는 힘든 것이다. 따라서 <서바이버>의 진행자는 출연자들이 힘들 때마다 불도 주고 생존지침도 준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과 끊긴 삶은 아니다. Q채널의 편성팀 강신봉 과장은 “겨우 42일 동안 문명인이 금방 야생환경에 적응해서 살기는 힘들다. 이 프로그램은 사람과 사람의 알력, 인간관계에 주목한 프로그램이다”라고 말한다. 즉 <서바이버>에서의 투쟁대상은 인간 그 자체다. 불을 피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을 피우면서 동료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이다. 탈락은 어차피 굶어죽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투표로 인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진짜냐, 아니냐”의 문제는 또 있다. <서바이버> 1탄에 출연했던 변호사 스테이시 스틸먼은, 이 프로그램 프로듀서 마크 버넷이 다른 사람 대신 자기를 탈락시키도록 참가자 두명을 설득했다며 최근 소송을 냈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가치는 리얼리티에 있으므로,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프로그램의 상품가치는 곤두박질치게 된다.

서바이벌 게임에서도 역시 현실과 게임의 미묘한 구분은 중요하다. 서바이벌 게임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페인트 볼을 쏘는 미국식과 비비탄을 쏘는 일본식이 있다. 비비탄을 쏘는 일본식의 경우, 탄의 직경이 6mm이므로 5.56mm인 K2 소총의 탄 직경과 비슷하다. 따라서 직경이 1mm인 페인트 건보다 진짜총처럼 만들 수 있으므로 마니아들이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색깔이 묻어나는 페인트 건과는 달리 비비탄을 이용하는 전동총은 총을 맞아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기만이 알 수 있다. 서바이벌 게임 마니아들은 “서바이벌 게임은 패러글라이딩처럼 어른들의 놀이다. 맞고도 안 맞았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는 다시 게임 못한다”고 말한다. 현실의 승부욕과 게임의 룰을 가리는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왜 ‘서바이벌’이 먹혀드는가

사진/윤태호의 만화 <야후>. 삼풍참사와 유사한 건물붕괴 이후 뒤틀린 젊은이의 인생을 그렸다.
만화나 영화는 ‘현실과 픽션의 미묘한 구분’이라는 제약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이들 장르는 원래 픽션이고, 대개의 경우 ‘주인공은 살아남는다’는 전제가 있기에, 어떤 상황이든지 최악은 아니다. 따라서 설정이 극단화되는 경우가 많다. 만화잡지 <부킹>에서는 삼풍참사와 그 생존자를 모델로 한 만화 <야후>(윤태호 지음)를 연재중이다. 부실 건물 때문에 아버지가 눈앞에서 으깨져 죽는 것을 목격한 주인공 김현은 비밀경찰대 야후에 들어가 폭력에 젖어 살아간다. 역시 삼풍참사를 소재로 한 만화 <아마존>(한혜연 지음, 나인북스 펴냄)에서는 온 가족을 건물붕괴로 잃고 혼자 살아가는 여의사 비연이 등장한다. 비연은 정신적 상처가 치유되기도 전에 낯선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감금당하는 등 불행으로 치닫는다. 지진으로 인해 문명이 파괴된 뒤의 서바이벌을 다룬 만화책 <생존경쟁>(사이토 다카오 지음, 아성미디어 펴냄), <드래곤헤드>(미네타로 모치즈키 지음, 서울문화사 펴냄)도 해일, 지진, 섬의 침몰 등 대형재난이 등장하지만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뚫고나온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도 서바이벌이라는 상황이 주는 박진감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일부러 과학적인 설명을 끼워넣는다든지 상황묘사를 세밀하게 해서 리얼리티를 강조한다.

문명이 자연을 정복했다는 21세기에, 어째서 서바이벌 문화상품이 속속 배출되는가? 역시 무인도에서의 서바이벌 요령을 다룬 책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의 저자 박경식씨는 “한국인들은 정리해고니 입시 때문에 늘 사회적 생존에 더 불안을 느낀다. 서바이벌이니 무인도니 하는 건 그래서 대중에게 먹혀드는 것 같다”라고 설명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생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다 자기 상황을 투영시키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그곳이 무인도이든 콘크리트의 정글이든, 살아남아야 하는 사정이야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민아 기자 mina@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