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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H형의 만화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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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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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놀라게 한 스케치, 그는 왜 강박증에 갇혀버렸을까

▣ 김대중 새만화책 공동대표

“H형은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머리가 복잡해 작업이 잘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림을 정말 잘 그리거든요. 지금은 하는 일 없이 그냥 있는데, 잘 얘기해서 작업할 수 있도록 하면 굉장히 좋은 걸 만들 거예요.”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H형을 만난 것은 4년 전 가을이었다.


출판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되었고, 책 두 권을 낸 시점이었다. 머리가 크고 투박한 외모에 눈길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하는 모습은 그를 순진하지만 어딘지 불안한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근데 보여줄 게 없네요. 몽땅 태워버렸어요. 그냥 낙서 몇 장….”

하지만 그가 더듬더듬 말하며 내놓은 몇 장의 스케치는 대단한 것이었다. 무인도에 사는 개와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칸을 육면체의 면들로 구성해 그것을 접고 펼치면서 매우 실험적이고 환상적인 연출을 보여주고 있었다. 상상력, 그림의 원숙함과 개성이 특별했다.

H형은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루의 대부분을 만화방에서 보내면서 자신도 그러한 만화를 그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한다고 했다. 30대 후반까지 사회적인 삶에서 멀리 떨어져 반지하 방에서 혼자 살면서도 만화에 대한 오랜 꿈을 놓지 않고, 골방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낸 ‘작가’를 만났다고 나는 속으로 기뻐했다. 그의 독특하고 신비주의적인 체험들과 깊이 있는 삶에 대한 이해 등은 내게 로버트 크럼이나 쓰게 요시하루 같은 만화가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후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그를 더 알수록 더 크게 기대를 품게 됐다.

H형은 주로 밤늦은 시간 아무도 없을 때 찾아와, 막차를 타고 가곤 했다. 차비가 없을 만큼 궁한 생활임에도 올 때마다 커트 보네거트나 필립 K. 딕 같은 공상과학(SF) 소설가들의 책을 선물로 가져왔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는데, 나는 그의 경험들로부터 만화가 될 만한 이야기를 끌어내고 싶었다. 많이 친근해지고 나서도 그는 한참 연배가 아래인 나에게 존대를 했다. 그는 의사소통의 창구로서 나에 대한 의지를 점점 키웠던 것 같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나는 그의 세계를 긍정하며 그가 자신의 만화를 만들기를 재촉했다. 어떻게든 원고를 만들어볼 요량으로 진행하던 잡지의 원고를 의뢰했지만, 몇 번의 마감이 지나고서도 완성하지 못했다. 마지막 비상 수단으로 계약서까지 작성해두었다. 결국엔 지금까지 해온 나와의 대화를 원고로 만들어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만남이 지속될수록 작업에 대한 조급증만 늘어날 뿐 실제 볼 수 있는 원고가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그는 점점 힘을 빼게 했고, 그사이 점점 진행하는 책들이 많아지면서 전처럼 그를 편한 마음으로 만나기가 힘들어졌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직접 만나는 것보다 전화를 자주 하게 되었다. 나는 H형에게 힘을 내어 자신을 극복할 것을 얘기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작업에 대한 부담과 고통을 이해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옆에서 전화 통화를 듣는 사무실 사람들은 반복되는 통화 내용에, 진전도 없이 한 작가에게 유달리 그럴 필요가 있는가 하고 짜증을 냈다. 그리고 어느샌가 나도 그의 전화에 무덤덤하고 때론 의도적으로 차갑게 답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궁금해진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사이 H형은 주차장 경비 일을 하고 있다고도 했고, 얼마 뒤엔 그만두게 되었다고 했다. 어느 때부터인가는 눈에 헛것이 보인다고 했다. 강박증이 그를 과대망상으로 몰고 간 것이다. 병원을 나온 뒤 그는 집에 내려갔다고 했다.

우리는 아직도 전화를 주고받는다. 이제 우린 만화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 지내는지, 잘 사는지, 건강한지 하는 얘기들을 할 뿐이다. 그래도 나는 H형이 어느 날 자신의 굴레를 넘어 완성된 원고를 들고 사무실의 벨을 누르길 기대하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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