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거대한 식량창고 구실을 하는 만경벌에서 농사를 짓는 정원덕(53)씨는 벼가 태풍에도 끄덕하지 않는 ‘도복방지제’를 개발할 만큼 ‘녹색혁명’에 관심이 많다. 박테리아로 인해 벼 잎이 하얗게 마르는 백엽고병과 고추가 검게 썩는 탄저병 등을 막을 방도를 찾기도 했다. 변변한 연구실도 없이 작물창고를 실험실 삼아 고기능쌀 개발에 몰두하던 정씨. 그의 관심 범위가 ‘유전자 재조합’(Genetically Modified) 작물에 이른 것은 몇 해 전의 일이다.
“황금쌀 볍씨를 구할 수 없나요?” 만경벌에서 농사 짓는 정원덕씨는 고기능 쌀을 생산하려고 한다.(사진/ 김수병 기자)
“도복방지제를 개발해도 상품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쓰러지지 않는 품종을 만들면 별도의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녹색혁명’ 꿈꾸는 농부의 좌절
아무리 태풍이 몰아쳐도 안정적으로 고기능의 쌀을 수확하는 것. 벼 유전자 기능을 밝혀내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기상 변화에 영향을 덜 받는 쌀을 안정적으로 수확할 것으로 기대하기도 했다. 유전자 재조합 기술이 다양한 기능을 가진 벼를 개발한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쌀의 질병 저항성이나 양분 흡수 등과 관련된 유전자가 발견돼 신품종 벼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이즈음 정원덕씨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황금벼’(Golden Rice)였다. 수선화와 박테리아에서 분리한 유전자를 이용한 황금벼로 지은 밥을 한 공기 먹으면 비타민A 부족에서 비롯되는 안구건조증으로 시력을 잃지 않을 것이란 보도를 접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황금쌀 종자를 소량이라도 얻으려고 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서 탁월한 기능의 벼를 재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물의 키를 조절하는 유전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농사에 적용하고 싶었는데 어디에서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어쩌면 세상 물정 모르는 농부의 철없는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박테리아에서 추출한 당 유전자를 넣어 추위와 가뭄·고염도 등 악조건에서 잘 견디는 ‘슈퍼 볍씨’나 혹명나방에 피해를 입지 않는 벼를 개발해도 농지를 확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유전자 재조합 작물 연구자를 만나서 자신의 뜻을 전하기도 했지만 끝내 볍씨를 얻을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정원덕씨가 만경벌에서 유전자 재조합 벼를 재배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국내 관련 연구기관에서는 벼와 고추, 감자 등 18개 작물을 대상으로 45종의 유전자 재조합 작물을 개발하고 있다. 다른 동식물의 유용 유전자를 식물의 유전체에 결합시켜 질병 저항성을 높이고 생육을 촉진하는 등 기능을 강화한 작물들이다. 이들 유전자 재조합 작물은 유전자 도입검정, 기능검정, 안전성 평가 등의 단계를 거쳐 생산된다. 국내에서 개발하는 작물 가운데 제초제 저항성 벼·고추·들깨, 바이러스 저항성 감자 등이 상품화를 위한 안전성 평가 단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유전자 재조합 작물 가운데 벼에 관한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벼를 주곡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소비국이 아시아권에 집중되어 선진국들의 연구가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않은 형편이다. 이에 견줘 국내는 벼 유전자 연구가 활발히 이뤄져 유전자 재조합 벼 개발에 유리하다. 이미 세계적으로 유전자 재조합 작물이 콩(전체 재배 면적의 56%), 옥수수(14%), 유채(19%), 목화(28%) 등 20여 종이나 된다. 올해 60억달러로 추산되는 유전자 재조합 작물 종자 시장은 2010년에 250억달러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유전자 재조합 작물이 급증해도 벼가 차지하는 비율은 크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벼의 유전자를 낱낱이 밝혀내도 고기능 쌀을 생산할 농지를 구할 수 없는 현실이다. 과학기술부가 지원하는 21세기 프론티어 연구개발사업 작물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 최양도 단장(서울대 교수)은 “벼 유전자 구도를 해독해 DNA 칩을 만들고 녹색형광단백질 유전자를 이식한 쌀을 만드는 등 벼 유전자 재조합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벼에 관한 유용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연구는 국내 연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유전자 재조합 벼를 개발해도 실험실 밖을 벗어날 길이 없다. 벼에 관한 연구를 하더라도 국내의 고기능 쌀 생산에 적용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다. 유전자 재조합 기술이 다양성의 한계를 지닌 전통적 육종법보다 기술적 장점이 크더라도 예기치 않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통념을 뛰어넘기 힘든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국내 주요 종자회사가 외국 기업에 넘어갔기에 유전자 재조합 작물이 실험 재배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내다보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유전자 재조합 작물이 안전성 평가를 통과한다 해도 ‘국산 GMO 1호’로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
황금벼를 개발해 인도와 베트남 등지에 보급하는 스위스의 연구진들. 오른쪽은 비타민 함량을 높여 생산한 황금쌀.(사진/ 한겨레)
실제로 유전자 재조합 벼만 해도 국내 재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현재 유전자 재조합 작물을 개발하고 상품화한 회사는 몬샌토, 칼젠, 아그레보, 노바티스, 신젠타 같은 다국적 농약회사와 종자회사다. 이들 회사는 주로 대두와 옥수수 등의 종자를 팔고 특허권을 행사한다. 대체로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에서 소비하는 쌀은 매력적인 상품이 아니다. 국내 연구자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유전자 재조합 특허가 있다 해도 기술 이전으로 챙길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벼 연구 과정에서 나온 성과를 옥수수처럼 선진국에서 대량으로 소비되는 작물에 적용하려고 한다.
특허 내도 챙길 것 별로 없다?
“국내에서 온갖 부담을 떠안고 쌀 수확량을 5~10%가량 끌어올리는 데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적용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유전자 재조합 작물이 시장의 대세로 잡을 게 틀림없다. 우리 나름의 기술력을 보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최양도 단장은 유전자 재조합 기술의 가능성에 대해 “푸른 장미 한 다발이 자동차 1대의 가치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물론 유전자 재조합 작물이 장밋빛 미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현재 시판되는 유전자 재조합 식품은 안전성을 검증받았다 해도 태아에 미치는 악영향 같은 잠재적 위험까지 제거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만경벌 농부의 바람은 ‘희망사항’에 머물 수밖에 없다. 국내 연구자들마저 유전자 재조합 작물의 종자를 실험실 밖으로 내보내길 주저하는 상황에서 황금벼 종자가 만경벌로 흘러갈 길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만경벌에서 농사짓기를 포기하고 동남아시아로 이주해 농토를 가꾸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복합 병 저항성 유전자를 이식해 무차별 농약 살포로 인한 환경오염을 막고, 사람의 건강에 좋은 여러 가지 성분을 넣어 밥만 먹어도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쌀을 바랄 수는 없는가. 그래도 언젠가는 생명공학자와 농민이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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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4년동안 안전성 평가 한다” 유럽에서 GMO 작물 수입 규제하는 건 정치적 이유 때문
유전자 재조합 식품을 바라보는 시선은 나라별로 차이가 크다. 이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에 관한 정보가 유통되는 사정에 따른 결과다. 정보공개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는 미국의 경우 소비자의 80%가 유전자 재조합 식품에 신뢰를 표명하고 있지만 국내 소비자의 신뢰도는 현저히 떨어진다.
식물 생명공학 단체 ‘크롭라이프 아시아’가 마련한 미디어 세미나에서 ‘현대 생명공학에서 유래하는 식품의 안전성 및 국제적 기준’에 대해 전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미국 파견단 고문 제임스 마리얀스키 박사를 지난 6월28일 만나 들어봤다.
국내에 Codex의 활동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 유전자 재조합 작물이나 식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단체는 아니다. 식품에 관한 연구의 표준이나 규칙을 정하는 기구다. Codex에서는 유전자 재조합 식품의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실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교역이 원활히 이뤄지도록 돕고 있다. 유전자 재조합 식품 안전성 평가 태스크포스는 세계보건기구나 미 식품의약국 같은 기관의 자문에 응하기도 한다.
현재 시판되는 유전자 재조합 식품의 안전성을 의심하는 연구 결과도 있는데.
= 적어도 시판되는 제품은 최소한 8~12년 정도 과학적 분석 방법에 의한 안전성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서 문제를 지적받은 제품은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다. 예컨대 파이어니어 하이브리드라는 회사에서 콩의 필수아미노산 함량을 높이려고 브라질 콩의 유전자를 이식했는데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것으로 나와 폐기됐다. 적절한 지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전성 평가를 해도 의도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 않은가.
= 생명공학 과학자들은 초기에 유전자를 선별할 때부터 악영향을 끼칠 부분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모든 육종은 비의도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에 충분히 검토돼야 한다. 최근 분자생물학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하면서 원하는 유전자를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확보되고 있다. 이를 통해 원하지 않는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줄었다.
그럼에도 유럽 등지에서 유전자 재조합 식품을 금지하는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 유럽에서도 유전자 재조합 작물이 식품과 사료용으로 수입되고 있다. 스페인의 경우 해충저항성 옥수수 경작지가 6만ha나 있다. 지구촌 어디나 유전자 재조합 작물의 안전성 평가는 엄격하게 이뤄지고 결정 사항도 같다. 유럽에서 수입 승인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안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가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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