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나라와 반일이 곧 정의라고 부르짖는 파시즘적 욕망… 고종 좇는 대통령과 북한 배제한 급진적 흡수통일론 위험해
▣ 황진미 영화평론가 chingmee@hanmail.net
<한반도>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유치함’이다. 학예회 연극을 연상시키는 웅변조의 대사나 70년대 반공영화를 계승한 전형적인 인물묘사 등 형식상의 유치함은 논외로 하자(누구나 한 장면만 보아도 알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지면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유치함은 따로 있으니, 노골적인 내셔널리즘을 표방하는 내용의 유치함이야말로 관객을 아연케 하는 필살기다. 그러나 단순무식한 내셔널리즘으로 반일과 통일을 부르짖는 이 영화의 속내는 간단치 않다. 바로 흡수통일과 파시즘의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이다.
<실미도> <공공의 적2>에서 이어진 정의론
강우석 감독의 영화가 원색적인 내셔널리즘을 표방한다는 건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 혹자는 <실미도>를 국가에 의해 자행된 인권유린을 폭로한 영화라고 오독하기도 했지만, <실미도>는 엄연한 국가주의 영화다.
“중앙정보부가 국가냐?”는 반문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전제한다. 다만 국가가 체제와 일관성을 갖추지 못함을 한탄하는 것이다. ‘군인 신분을 달라’ 항의하며 자폭을 택하고, 죽어가면서도 주민등록번호를 적는 그들의 몸짓은 무얼 말하는가. 바로 국가만이 존재의 근거임을 강변하는 것이다.
‘허술한 국가가 아닌 강한 국가를 달라. 목숨 바쳐 충성하겠다’는 <실미도>의 메시지는 ‘강한 국가가 곧 정의이기 때문이다’라는 <공공의 적2>의 메시지로 이어진다. 정의감과 서민의식에 불타는 검사 강철중이 법적 절차를 뛰어넘어, 국부를 유출하려는 엘리트를 처단하고, 그 행위가 다시 법에 의해 호위되는 것은 ‘강한 국가가 정의를 수행한다’는 웅변과 다름없다. 이러한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의 극한에 영화 <한반도>가 자리잡는다.
<한반도>는 선명한 반일 영화다. 가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재밌는 영화> <도마 안중근> 등에 필적한다. 본래 민족주의는 정교한 이념이 아니다. ‘민족적 동질성’이라는 감정을 기반으로 쉽게 대중을 동원하며, 곧잘 인민주의(포퓰리즘)나 상업주의와 결합한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냐고? 항일 민족주의자들은 의인이지 않았냐고? 식민지의 민족주의는 제국에 대한 저항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지만, 민족주의 자체가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국의 민족주의와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다른 민족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패권적으로 작동한다.
민족주의의 패착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돈 남 말하는 사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하지만 김구 선생의 말씀처럼, 남의 나라 침략하지 않고 민족문화를 꽃피워 세계에 전파하는 ‘아름다운 민족주의’가 가능하지 않냐고? 경계가 몹시도 애매하지만, 그나마 그 말씀 중에 건질 것은 ‘평화주의의 원칙’이다. 민족주의가 평화주의와 함께하지 않을 때, 그 민족주의는 곧바로 악으로 전화한다(이를 김구 선생도 알고 계셨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영화 <한반도>가 노정하는 찐~한 민족주의에 그 ‘평화의 원칙’이 없다는 것이다.
점진적 통일론자를 친일파로 만들다
7·4 공동성명에서 6·15 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남북이 합의한 통일의 원칙은 세 가지다. 평화적·자주적·민족 대단결의 원칙. <한반도>는 ‘민족적 동질성’을 당위로 삼는 통일론을 전개한다. 영화는 체제의 차이를 뛰어넘어 남북이 경의선 완전 개통에 합의할 만큼 ‘민족 대단결의 원칙’을 보여주며, 강대국들의 반대에도 통일사업을 강행할 만큼 ‘자주통일의 원칙’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반도>의 통일론에는 ‘평화’가 없다. 경의선 완전 개통이 바로 남북의 ‘평화통일’을 상징하는 것 아니냐고? ‘평화통일론’에서 ‘평화’는 남북 관계에만 국한되는 원칙이 아니다. 통일의 전 과정에서, 국제 관계나 남북한 내부의 의견 수렴 과정 역시 평화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통일을 위해 일본과의 일전도 불사하고 남한의 내전 상황도 불사한다.
일본 군함과 대치하고, 정부종합청사가 폭파되는 상황은 끔찍하지만, 감독은 통일을 위해선 외부와 내부의 반통일 세력과의 결전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린다. 물론 무모하고 감상적인 통일론을 배격하고 안전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합리적 통일론’의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총리(문성근) 등의 입을 거치면서 결국 경제적 실리를 위해 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반통일론’으로, 심지어 을사늑약에 찬성하고 일본인 되기를 앙망하는 친일론자들의 주장으로 변질, 매도된다. 통일의 절차와 시기에 관한 다층적 논의가 존재함에도 민족적 동질성에 입각한 ‘우선 통일론’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은 반통일론자들이며, 나아가 친일파라는 민족주의적 흑백논리의 칼날이 영화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한편, ‘민족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안팎으로 싸우는 전 과정에 북한은 빠져 있다. 중국의 논평은 뚜렷이 들리지만, 북한의 입장은 황당하다는 위원장(백일섭)의 표정 하나로 대치된다.
동해의 무력적 대치 상황에서도 북한의 움직임은 나오지 않는다. (경의선 문서 문제에서 북한이 배제된 건 북-일 수교가 없기 때문이라 치더라도) 문제의 당사자요,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보유한 북한이 일본 군함의 전진 배치에 미동도 없다는 것이 납득되는가? 남한이 일본과의 전쟁 위기와 쿠데타 상황으로 빠져들 때 북한의 움직임은 그려지지 않으며, 국군 역시 군을 재배치하면서 북한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북한은 더 이상 남한의 적이 아니며, 우리 민족끼리는 이미 통일에 합의했음’을 전제했기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도 있지만, (<쉬리>에서 보았듯) 북한 내에도 반통일 세력이 있을 가능성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은 ‘나이브’한 발상이다. <쉬리>는 (북한을 적대적으로 그렸다고 비난받을 수 있지만) ‘박무영’의 입을 통해 북한 주민이라는 생생한 타자를 대면케 해주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북한’은 타자성을 상실한다. 남한은 통일을 둘러싸고 좌충우돌을 겪는 주체이지만, 북한은 위원장의 얼굴 하나로 표상되는 ‘통일의 대상’일 뿐이다. <한반도>는 북한을 ‘동포’로 볼지언정 하나의 주권국으로도, 다양한 의견들이 얽혀 있는 사회체로도 보지 않는다. 결국 북한을 통일의 주체로 인정치 않는 <한반도>의 통일론은 ‘급진적 흡수통일론’이며, 전술하였듯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을 반통일론자 혹은 반민족주의자로 몰아붙일 과격한 과정도 암시돼 있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을 동일시한 전략
사실 <한반도>가 무슨 통일론을 내세운다 한들 놀랄 게 없다. 이미 <실미도>에서 김일성 목을 따겠다는 의지가 남북회담으로 좌절되자 분통을 터뜨리는 ‘승공통일론’을 보지 않았던가? <실미도>나 <한반도>에는 ‘평화’나 ‘타자에 대한 존중’ 따위는 없다. <실미도>에서 대원들의 열악한 상황을 증명하기 위해 성폭행 장면이 삽입되고, 국새를 찾기 위해 문화재 마을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장면을 통해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을 정녕 알 수 있다. 경복궁을 파기 위해 정부종합청사쯤 폭파한들 뭐가 대수이겠는가?
<한반도>는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을 승계했다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음’이 명시돼 있다. 대한제국은 입헌군주국도 아니고 전제군주국이었다(‘홍범 14조’를 헌법으로 보는 건 무리다). 헌법에 의해 관계 규정된 공화국의 ‘정부와 국민’은 군주국의 ‘왕과 백성’과 완전히 다르다. (국민은 주권자이지만, 백성은 주권이 없으며, 대한제국이 맺은 조약의 주체는 황실이지 백성이 아니다. 또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며 죽은 명성황후는 조선 백성을 대의(代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대통령을 고종에 포개면서 100년의 세월을 건너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강우석 감독의 역사적 몰이해로 치부하기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우선 <피아노 치는 대통령> <프라하의 연인> <진짜진짜 좋아해> <궁> 등 대통령을 왕처럼 그리거나(가령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 그 자리에서 이탈하려는 대통령과 딸의 모습은 임기가 없는 왕과 공주의 모습이다), 아예 진짜 왕실을 상상하는 텍스트들이 보여주는 대중의 욕망은 무엇인가? <왕의 남자>에서 대신들을 경멸하며 광대극을 통해 죽이다가 정치적 자폭을 택한 폭군 연산에게 보낸 관객의 열렬한 애정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대중은 군주를 좋아해♬” 맞나?
다음으로 고종과 대통령(안성기)의 정치술을 살펴보자. 고종은 일본과 권신들에 둘러싸여 자신의 거부 의사를 직접 표명하지 못하자, 가짜 국새를 통해 자신이 결재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적의 전횡을 폭로한다. 즉, 자신의 부재를 통해 의지를 증명해 보이면서 적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실제로 고종은 부재를 통해 자신을 증명했다. 그의 완벽한 부재, 죽음은 3·1 운동과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일본과 반대파에 둘러싸인 대통령(안성기) 또한 가짜 국새를 탈취당함으로써 적의 존재를 드러내고, 스스로 죽음을 연출함으로써 반대세력의 전횡을 드러나게 하며, 그로 인해 국방장관과 국정원의 친위 쿠데타를 유발한다.
정부종합청사 폭파로 지지를 만든 대통령
국새를 감추기 위해 경복궁에 불을 지른 것과 국새를 찾기 위해 정부종합청사를 폭파하는 것도 겹쳐진다. 대통령은 자신의 부재를 통해 대립과 위기를 드러내고, 표출된 불안을 자신에 대한 지지로 흡수한다. (이 대목에서 우습게도 탄핵 정국이 떠오른다. 기실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발언도 선출직 공무원의 발언이 아니라 세습군주의 발언이다.) 이 ‘부재를 통한 통치’가 바로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군주’의 통치술이다. 대통령이 “그분도 그러했을까” 곱씹으며 자신을 고종과 동일시하고, 친위 쿠테타를 통해 반대세력을 물리칠 때, 그가 꿈꾸는 것은 현대판 전제군주다. 이것이 군주를 욕망하는 대중의 무의식과 결합할 때, 파시즘은 도래한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엔 일관된 정치철학(?)이 흐른다. 내셔널리즘과 포퓰리즘, 그들이 결합한 파시즘이 그것이다. 정치영화가 드문 한국 영화계에서 거의 유일한 정치영화의 이데올로기가 하필이면 파시즘이란 점은 불행이지만, 선명한 노선 속에 극복 지점도 확연하게 보인다는 점에선 다행이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가 원색적인 내셔널리즘을 표방한다는 건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 혹자는 <실미도>를 국가에 의해 자행된 인권유린을 폭로한 영화라고 오독하기도 했지만, <실미도>는 엄연한 국가주의 영화다.
영화 <한반도>는 강한 국가주의를 내세워 천만 관객을 기대하고 있다. 국정원 서기관으로 분한 차인표가 총을 겨누고 있다.

<한반도>를 관통하는 급진적 흡수통일론은 강우석의 신념일까. 남과 북이 손을 맞잡아도 ‘평화’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강한 국가주의는 방화와 폭파를 마다하지 않는다(위). 영화 <공공의 적2>(오른쪽)의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 <한반도>에 이르러 더욱 극대화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