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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보고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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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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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류 대리, <성공하는 사람들의 보고습관>을 기획하다

▣ 류선미 기획출판 거름 기획편집팀 대리

<성공하는 사람들의 보고습관>이 제목 회의의 산통을 겪던 날, 제목 시안을 설명하다가 문득 성공하고 싶으면 너의 태도와 습관을 바꾸라던 상사의 꾸지람과 호통에 밤잠 못 이루던 몇 년 전 일이 덜컥 떠올라 울컥 밀어붙였다.

제목이 결정되고도 한참을 열없어했다. 그러나 어쩌랴. <성공하는 사람들의 언어습관>이란 책과 함께 시리즈로 묶일 책이라 회의 시간 내내 힘주어 말했던 건 나였고, 그 결과 제목이 결정됐으니….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개인적으로 회사 생활은 내 체질이 아니라며 좌절하는 날이 1년에 364일이고, 상사와 대화하는 법을 몰라 상사의 책상만 매만지다 오는 내가 성공하는 사람들 운운하다니.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돈 벌어오라는 아내의 바가지에 냉큼 재테크 책을 기획했다는 어느 선배의 말처럼 편집자는 자기가 궁금하거나 답답한 현실에서 기획을 건져낸다고 했던가. 보고와 관련해 유난히 많았던 아픈(?) 추억이, 내가 이 책에 애정을 가지는 이유라면 이유다.

A상사와 나는 불협화음을 자랑하는 환상(?)의 콤비였다. 그는 나에게 필요한 지시 외에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며, 가끔 의무방어전처럼 하는 농담은 엇박자같이 번번이 타이밍을 놓쳤다. 나 역시 직속 상사와의 대화가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지금 같았으면 <개그콘서트>의 고음불가 흉내라도 내며 살짝 농담을 걸어보기라도 했을 텐데(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행복했을 일이 어디 한두 개냐마는…). 우리 둘의 관계는 끝없이 저음으로만 치달았다.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서로 동의하고 있었지만, 그 방법을 몰라 헤매던 우린 그 어색함을 견디다 못해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덕분에 우리 둘은 서로의 업무를 자세히 알지 못했고, 당시 회사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8할은 상사와 대화하는 법을 모르는 데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내 회사 생활은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B상사와는 꾸중인지 대화인지 알 수 없는 티타임을 오래오래 가졌던 기억이 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B상사는 보고받을 시간조차 없는 자신의 일정을 이야기하며 업무의 효율성과 결과를 강조했고, 상사의 말에는 한없이 낮은 자세로 임하는 나는 습관대로 그 단어에만 집중했다.

업무의 효율성(?)에 집중한 나는 바쁜 상사를 배려(?)해 결과만을 보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결과 보고만을 듣고 사장에게 보고하던 B상사는 저자와 왜 문제가 생겼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고, 사장에게 이런저런 걱정의 말을 들은 그는 나와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던 것이다. 그의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도 모르고 난 그 자리가 저자와의 문제로 일정이 뒤틀려 계속된 야근을 독려하려는 자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B상사는 내가 야근을 하는지 않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관심도 없었다. 말의 서두를 잡지 못해 에둘러 말하는 그를 보며 난 어리둥절해졌고, 그가 티타임을 가진 본심을 듣기 위해 애국가를 1절에서 4절까지 부르고, 주변의 나뭇잎을 셌다(하늘에 별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예민’하고, ‘얌전’해서 너무나 말이 없다고 했다. 결국 말을 조금만 더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난 찐빵 100개쯤 먹고 물을 못 마신 사람처럼 답답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나왔다. 저자와 나눴던 이야기 반만이라도 그에게 전했어야 했다고 후회를 하며….

우린 아니 나는 회사 생활을 하며 무엇을 하든 대박을 터뜨리는 일명 ‘미다스의 손’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다. 단지 일한 만큼 인정받고 싶다. 그런 개인적인 목마름이 담겨 있었기에 내가 이 책을 만들면서 느낀 카타르시스를 독자들도 느끼길 바란다.

그 뒤의 내 보고습관이 궁금한가. 이 글을 끝마칠 때쯤, 난 또 상사에게 불려갔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말 없는’ 류 대리 문제였다. 보고의 레벨을 높이기엔 난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응용의 정도는 개인별로 다 다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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