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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업계에도 노사정위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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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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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급제와 법정근로시간 둘러싼 영화노조와 제작가협회의 줄다리기 계속… 양극화된 임금구조와 스태프 재교육 등의 문제 풀어갈 별도 기구 필요

▣ 김수경 <씨네21> 기자 lyresto@cine21.com

영화노조의 단체협상이 교통체증에 가로막혔다. 4월27일부터 한국영화제작가협회(회장 김형준·이하 제협)와 시작한 단체협상이 진전의 기미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상견례를 한 뒤 한 달 반이 지나도록 제협이 미온적인 반응으로 일관하자, 영화노조는 상대의 무성의한 협상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영화노조는 6월7일 성명서를 통해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즉각 교섭대표단을 구성하고 노동조합과 성실 교섭에 임하라”고 일갈했다. 영화노조 김현호 정책실장은 “쉽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다. 문제는 제협 쪽이 자꾸 협상 시기를 차일피일 미루는 점이다. 임금협약의 효력은 1년, 단체협약의 효력은 2년이다. 제협은 적극적인 협상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과 한국영화제작가협회가 공동으로 가진 ‘영화현장 스태프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발전적 노사관계 모델 발표회’. 양쪽의 주장이 맞서 타협점을 찾기 쉽지 않았다. (사진/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제공)

지난해 12월15일 국내 최초로 설립된 영화노조의 첫 단체협상은 이렇게 첫 장애물과 부딪쳤다. 제협은 “실질적으로 현장의 스케줄과 진행을 대부분 결정하는 감독, 투자사, 매니지먼트 등 다른 주체들과 간담회를 거친 뒤 양자가 단체협상에 임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영화노조 쪽은 “그것은 실무교섭을 통해 풀 수 있다. 법적으로 아무런 효력도 없는 다자간담회를 통해 공감대를 높이자고 요구하는데, 지난해 노동교육원에서 1년간 공동 연구를 했고 공청회도 두 번이나 거쳤다. 협상 시기를 늦추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실제로 제협 내부에서는 몇몇 진보적 성향의 영화사를 제외하면 이 사안을 등한시해 단체협상의 교섭 및 체결권 동의에 늑장을 부리거나 무관심한 영화사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용자가 노동자의 절박한 환경에 무심한 것은 영화산업도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다.


주급제는 악성적 해고로 이어질까

양쪽 갈등의 핵심은 주급제 도입과 근로시간이다. 영화노조는 현재 관행적으로 선금 50%, 잔금 50%로 지급되는 임금 지급을 “주급제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노동법 49조가 보장한 “일일 근로시간 8시간 엄수”와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적용하더라도 “일일 근로시간이 12시간을 넘기지 않고, 일요일만 쉬게 해달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지난 4월14일 국회에서 열린 ‘영화산업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오기민 제협 정책위원장은 “이러한 움직임은 영화 제작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임은 틀림없지만 현재 풍토에서 주급제가 일률적으로 강행되면 자칫 악성적 해고가 빈번하게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김형호 정책실장은 “채용의 객관적 기준만 확보된다면 근로기간과 급여기간이 일치되는 면을 감안하면 주급제로 인해 고용 기피나 해고가 쉽게 증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응했다.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장 근로시간으로 악명이 높고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해도 이는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그러나 제협을 중심으로 한 제작자들은 이런 노조의 요구가 영화산업의 특수성을 도외시한 발상이라고 말한다. “일반 제조업과 동일한 기준으로 근로시간을 적용한다면 제대로 진행되는 촬영 현장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오기민 정책위원장은 “영화노조의 현재 요구는 미국 수준인데 거긴 근로기준법이 없다. 또한 우리와 노동 환경과 스태프의 숙련도가 다르다. 국내 현장은 인턴과 전문 스태프가 구분이 안 된다. 스태프들이 미숙해서 시간을 끄는 문제가 현장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데 노동시간만 강조하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한국 영화산업은 학교나 교육기관이 맡아야 할 부분까지 감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으면 4대 보험이나 연장·야간 수당의 정착 같은 다른 현안들도 논의되기 힘들다.

현장의 쟁점은 제협 처지에서는 ‘전문스태프제’, 영화노조 처지에서는 ‘스태프의 재교육, 경력인증제’의 문제다. 영화 현장 제작 인력의 90% 이상이 비정규직(단속적 계약직)이며 연간 참여 편수가 1.24편에 불과한 현실에서 전문성 있는 인력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숙련된 인력은 늘 부족하고 프로덕션의 효율은 떨어진다. 스태프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만큼 작품에 참여하기란 불가능하고 살인적인 노동환경은 지속된다. 무엇보다 영화의 꿈을 품고 충무로에 뛰어든 수많은 젊은이들이 상처만 안은 채 날마다 현장을 떠나간다. 게다가 도제 시스템의 잔존과 팀별 계약의 관행이 맞물려 제작사 쪽은 “과연 현재 기사급을 제외하면 우리가 하부 스태프들을 마음대로 고용할 권한이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각 파트의 팀장과 하위 스태프 간의 임금 양극화 현상은 갈수록 커진다.

지난 1년간 10여 개의 영화 현장을 방문 조사했고, 제협과 영화노조의 공동 연구에 참여한 노동연구원 황준욱 박사는 “현재로선 영화산업 종사자의 각종 평균값을 논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수치보다는 M자형으로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영화산업의 임금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적인 합의를 위해 노사 모두 시장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영화산업고용위원회 같은 형식으로 노사정을 대표하는 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4대 보험이나 스태프 재교육 사안에는 영화진흥위원회와 문화관광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 유관단체는 법 개정을 통해서라도 단속적 근로 형태가 지배적인 영화산업의 특성을 인정받는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영화정책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 문화정책 파트가 제안한 프랑스의 공연예술 비정규직(앵테르미탕·Intermittents du Spectacle) 실업급여 제도를 국내 현실에 맞게 유사 제도로 적용하는 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

싸이더스FNH등의 동의를 끌어내다

영화노조가 차근차근 난제를 풀어가는 동안 희망은 서서히 싹트고 있다. 지난 8, 9일 미국 국제영화영상극장연극산업연맹(IATSE)과 프랑스 영화방송산업노동조합(SNTPCT)이 영화노조에 단체협상의 지지와 연대 투쟁을 약속했다. 영화노조는 제협 소속사를 비롯한 23개 영화사에 단체교섭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하는 동시에 주요 영화사들과 개별 접촉을 시도했다. 이것은 제협이 감당해야 할 회원사의 동의를 영화노조가 직접 끌어내는 시도였다. 그 결과, “싸이더스FNH, MK픽처스, 아이필름코퍼레이션 등 주요 영화사가 제협에 교섭 및 체결권 위임했다”고 영화노조에 통보했다. 제협은 산별교섭을 위해 사용자 단체구성을 진행 중이다. 최근 영화노조는 6월23일 다시 단체협상 테이블을 마련할 것을 제협에 제안했으며 제협은 사용자 단체 구성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해 협상 시점을 7월 초로 미루기를 희망한 상태다. 하루빨리 사용자 단체가 구성돼 협상의 자리에서 진일보한 제안이 오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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