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언 남부민의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시절에 근무하던 자선병원인 마리아수녀회 구호병원에는 노숙자들이 눈에 띄게 많이 찾아왔다. 길에서 생활하던 이들의 퀴퀴한 냄새를 수녀님들은 ‘가난의 향기’라고 표현한다.
향기를 풍기며 아픈 배를 움켜쥐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K씨를 병원 접수처 앞에서 처음 만났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조그만 짐 보따리와 견디기 힘든 복부통증으로 연방 아픔을 토해내는 깡마른 몸뚱이밖에 없어 보였다.
복부는 터질듯이 부풀어올라 손만 대어도 아파서 깜짝 놀랐다. 복부 엑스선 사진은 창자가 엄청나게 늘어났음을 보여줬다. 청진상 금속성의 쩌렁쩌렁하는 장음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쉽게 기계적 장폐쇄로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응급 개복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혈압은 겨우 유지됐지만, 빠른 맥박과 발열로 응급수술을 하지 않으면 장이 썩어 패혈증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경찰에 신원조회를 하여 가족과 전화 연락을 하는 동안에 검사한 CT 소견은 최악이었다. 직장암이 전이돼 골반에 퍼져 있었다.
인공항문을 내는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는 최근 보름 동안 대변은 고사하고 방귀조차 뀌지 못했다고 한다.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비우는 것이라는 광고 카피도 있지만 그는 채울 수도 비울 수도 없었다. 결국 인공항문을 내는 수술로 위기를 넘겼고, 얼마간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뿐이었다.
수술 다음날 아침 회진 시간이었다. 수술 부위의 통증은 있었지만, 그는 쑥 꺼진 배로 한결 편해 보였다. 한쪽 다리를 꼬고 침대에 누워 이렇게 말했다. “수녀님, 이제 통증도 한결 낫고 편해요. 요즘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알아야 하니까 TV 좀 켜주세요.” 얼마나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그가 오려서 고이 접어 간직하던 암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면, 그는 자기가 암이란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나에게 처음부터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직장암이라고 하면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게 두려웠을까? 집안 형편도 그렇고 자신은 노숙하는 처지이니 오죽했겠는가? 터질 듯이 아픈 배를 움켜쥐고 보름을 버텨냈으니 말이다.
그는 퇴원한 뒤 반년 가까이 경구용 마약진통제로 그럭저럭 암성 통증을 잘 견뎌냈고, 인공항문 관리도 잘됐다. 어느 날 ‘사랑그루터기’라는 부산역 노숙자 진료소에 들렀다가 복도에서 그를 만났다. 기초생활보호대상자가 되어 매달 생계비 20여만원을 지원받고 있지만 노숙생활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형은 재래시장에서 청소를 하고, 형수는 정신분열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데다, 인공항문을 한 채 조카와 한 방에서 생활하기가 여간 거북하지 않았다고 했다.
몇 달 뒤 형수와 함께 병원에 온 그는 조절되지 않는 통증과 혈뇨에다 소변 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암이 방광까지 침범한 모양이었다. 그는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고 심한 빈혈에다 통증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제는 죽음을 편하게 맞을 수 있도록 호스피스를 하는 일만 남았다.
임종 며칠 전, 내 손을 잡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지상에서의 고달팠던 순례를 마치고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길을 떠났다. 다음날 저녁 퇴근길에 영안실에 들렀을 때 그는 영정 속에서도 웃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도 고귀하게 죽어가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마더 테레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노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내게 가르쳐주고 떠나갔다. 영혼의 안식을 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경찰에 신원조회를 하여 가족과 전화 연락을 하는 동안에 검사한 CT 소견은 최악이었다. 직장암이 전이돼 골반에 퍼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