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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사의 지킬과 하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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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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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의 모습이 달라지는 편집자들, 이거 직업병일까

▣ 임은실 김영사 편집부 실장

얼마 전 우리 회사의 한 남자 직원이 여장을 하고 아침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길게 곱슬거리는 갈색 가발을 쓰고 나타난 것이다. 회의장은 잠시 비명과 웃음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시 그의 정체는 ‘웃음도깨비’. 회사 동료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즐겁고 재미있게 하여 웃음을 전염시키는 것이 김영사 웃음도깨비의 미션이다.


웃음도깨비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바뀐다. 웃음 경영이 매스컴의 화두로 떠오르던 올 초에 한 직원이 웃기는 회사 생활을 만들기 위한 여러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그중에 하나 채택된 것이 바로 ‘웃음도깨비’였다.

그 남자 직원의 온몸을 던진 임무 수행으로 잠시 회사는 뒤집어졌지만, 오후 시간이 되면서 여자들을 중심으로 심상치 않은 후유 증세가 발견되었다. 그건 바로 점심을 먹으면서 한 남자 직원이 무심코 던진, “우리 회사 어느 여자보다 훨씬 이쁘더라”는 말 때문이었다. 무심코 던진 돌에도 개구리는 죽는 법이다. 오후 내 틈틈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기반성과 검열을 거듭하던 한 여직원이 반성을 쓰레기통에 던지더니 분연히 반격에 나선다. “그 선배 혹시 진짜 여자가 되고 싶었던 거 아냐?”

사실 그 남자 직원은 망가지려야 망가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여자의 미모를 넘보는 얼굴과 미끈한 다리, 그게 화근이었다. 그가 안팎이 남자인지, 사실 내면은 여자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출판가에는 낮과 밤의 자아가 분리되는 사람이 꽤 많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우리 회사의 한 여인은 하루 종일 맨얼굴로 일하다가 퇴근시간만 되면 팔색조로 변신한다. 표정 또한 근검절약에서 생글 과소비 모드로 바뀐다.

“이거 너무하네. 그 웃음, 그 미모, 왜 우리한테는 안 줘?”

회사 동료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으면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하며 사라진다.

“집에서 화장하는 사람 봤어요?”

그녀에게 회사는 집의 연장이다. 진정한 외출은 퇴근과 함께 이루어진다. 퇴근 뒤 그녀의 삶은 미스터리. 다만 이단 혹은 삼단 변신 로봇처럼 달라져서 나갔으니, 밖에서는 다른 삶을 살지 않겠느냐는 추측뿐.

내가 아는 출판가의 한 후배는 퇴근 뒤 활동 무대가 주로 홍익대 앞의 클럽들이다. 클럽을 순회하며 그녀는 맘보와 살사, 부기, 차차차, 디스코 등을 춘다. 문화 강좌를 통해 갖가지 춤을 배우기도 한 그녀는 이렇게 주장한다. 춤은 자기에게 육체노동과 같은 거라고. 하루 종일 문자와 씨름하며 과도한 정신노동을 했으므로 밤에는 육체노동이 필요하다고. 그러므로 그녀는 정신과 육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킬과 하이드가 되는 것이다.

어느 편집자는 밤마다 공격적인 독자로 변신한다. 즉, 낮에는 책의 공급자로서 소비자들로부터 책을 잘 만들었느니 제목이 별로니 하는 평가를 주로 받다 보니 그에 대한 역할 전환 욕구가 생긴 것이다. 어느 인터넷 서점의 유명한 논객이기도 한 그는 밤마다 냉혹한 독자가 되어 남이 만든 책을 품평하는 것으로 소일한다.

이렇듯 출판사에는 많은 지킬과 하이드들이 산다. 그런데 어딜 가도 편집자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어딜 가도 티가 나기 마련이다. ‘싼이자로 대출해드립니다.’ 길거리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나눠준 명함 크기의 광고물을 들여다보며 ‘싼’과 ‘이자’ 사이에 무심코 띄어쓰기 표시를 하는 여자, “초판 안주 다 나갔나? 그럼 재판 깔자!” 하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하는 남자. 그가 술잔을 부딪치며 하는 구호는 “삼판을 위하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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