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화상이 서울에 온 까닭은…
등록 : 2006-06-09 00:00 수정 :
미술품 유통 방식을 천천히 바꿔가는 한국국제아트페어, 다섯번째 장… 13개국 150개 화랑의 참여로 신진작가들의 중·저가품 다채롭게 선보여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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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조그만 탁자를 사이에 두고 흥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재래시장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듯한 풍경이었다. ‘가게’의 주인은 남미 칠레의 산티아고에 있는 갤러리 아르테콘템포라네오의 낸시 바베스트렐로 디렉터. 그는 칠레의 유명 조각가 파롤로 발데즈의 청동 황소를 비롯해 30여 점을 들고 서울 코엑스 태평양홀을 찾았다.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은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세 번째 참가한 것이다. 이때 거래는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칠레에 진출한 국내 기업의 담당자는 가격을 흥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낸시는 제시한 가격에서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본 갤러리 통해 10여점 판 최지현씨
“지난 2004년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칠레무역관으로부터 초청 의사를 전달받아 아시아 미술시장 진출을 꾀하며 연속 3년째 서울을 찾았어요.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아 서울 코엑스 태평양홀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 모두 3천여 점이 전시된 올해 KIAF는 명실상부한 국제적 행사로 발돋움했다.(사진/ 윤운식기자)
올해는 칠레의 대표적인 중견·신진 작가를 선별해왔는데 컬렉터들의 반응이 좋습니다.” 실제로 낸시가 가져온 작품은 대부분 작품성을 인정받고 컬렉터의 눈을 사로잡아 가격 결정은 간단히 이뤄졌다. 발데즈의 철·세라믹 조각작품 <코루스>(Korus)는 3500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낸시의 남편 프란시스코 살라스는 오는 10월 갤러리 마모에서 열릴 개인전을 앞두고 작품을 내놓아 호평을 받았고, 신진 화가 마티아스 베르가라의 작품도 세련된 붓 터치로 관심을 모았다.
이렇듯 남미 칠레의 작가들까지 국내 미술시장으로 끌어들인 KIAF. 올해 행사는 13개국에서 150개 화랑이 참여해 저마다 크고 작은 부스를 차렸다. 여기에는 샤갈과 피카소, 구사마 야요이 같은 세계적 거장을 비롯해 백남준·김환기·이우환 등 국내 거장, 팡리쥔·왕두 등 중국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도 있었다. 이들의 작품이 수천만원을 웃돌지만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수십만원대부터 책정됐다. 만일 ‘성형 쇼핑’이나 ‘핸드백 쇼핑’을 포기한다면 웬만한 작품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국제적인 아트페어에 단골로 참가하는 갤러리에서 내놓은 작품이라 질적 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올해 KIAF에서는 외국 화랑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 일본 등 외국 화랑이 무려 50여 개의 부스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 가나가와현의 도시 후지사와에 있는 기획전문 화랑 쇼난다이 갤러리는 네 작가의 작품을 아트페어에 선보였다. 쇼난다이 갤러리의 야마모토 미치코 디렉터는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작가의 유명도와 관계없이 재능 있는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갤러리에서 발굴한 작가들의 새로운 작업과 생각을 한국에 전할 좋은 기회로 삼으려 했어요. 서울에서 열리는 아트페어는 작품의 거래에도 의미가 있지만 미술 교육의 장 구실을 하는 게 인상적이네요.”
놀랍게도 쇼난다이 갤러리의 부스에는 한국인 작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0대의 젊은 화가 최지현씨였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화가의 작품이 일본 부스에 걸리게 된 데는 사정이 있었다. 지난 2004년 4월 일본에 갔다가 미술계 동향을 파악한 뒤, 9월에 다시 배낭을 꾸릴 땐 포트폴리오를 챙겼다. 포트폴리오라고 해봐야 작품 이미지를 담은 CD와 각종 전시 팸플릿이 전부였다.
KIAF에서 중견겱탕?작가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날것으로 드러낸다. 아프리카 풍경을 그리는 김정자씨(위)와 일본 갤러리를 통해 KIAF를 찾은 최지현씨(오른쪽).
“일본에서 전시를 할 기회를 잡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뚜렷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죠. 우연치 않게 지인으로부터 쇼난다이 갤러리의 기획전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갔어요. 당시 말도 통하지 않았는데 포트폴리오만으로 전시 일정을 잡을 수 있었죠.”
박정자의 아프리카로 채워진 갤러리 인데코
사실 최지현씨는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고 단체전에도 참여했다. 최씨의 관심사는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이다. 시각적 이미지를 생산하는 작가로서 기억으로 남는 이미지들을 ‘수집’해 자신의 생각이나 상상을 더해 캔버스에 저장하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저마다 다른 모양의 나무가 자라거나, 여행을 하며 만난 소가 무심한 표정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식이다. 여기에 작가의 경험만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기억교환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꾀하기도 한다. 기억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의 편린들을 담은 작품들에 ‘소통’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전시 공간을 벗어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작품일 뿐이었다.
올해 KIAF 주빈국으로 참가한 프랑스는 회화겵떠쥈디자인 등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다. 한 프랑스 갤러리 부스에 대형 조각상이 설치돼 있다.
“멀리 돌아서 국내 아트페어에 참가 기회를 얻은 셈이죠. 일본에서 전시할 때 조깅을 하다가 화랑에 들어와 그림을 구입하는 사람들을 봤어요. 그런 풍경이 마냥 부럽기만 했는데 이번 아트페어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한 중년남성이 여고생 딸에게 선물하고 싶다면서 제 그림을 사더라고요.” 젊은 작가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경험임이 틀림없다. 어렵게 전시 기회를 얻어도 ‘아는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으면 수십만원대 작품도 ‘시집보내기’ 어려운 탓이다. ‘미술 5일장’에서 최씨는 10여 점의 작품을 시집보냈다. 한 작품은 ‘찜한 사람’이 잠시 다른 작품을 둘러보는 사이에 주인을 만나기도 했다.
그동안 아트페어가 꾸준히 열리면서 미술작품에 대한 구매력이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유명 작가의 고가 작품이 줄어든 대신 젊은 작가의 중·저가 작품이 늘어나고, 대작보다는 소품 위주로 전시하면서 컬렉터의 폭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뭉칫돈’을 들고 컬렉팅에 나선 사람들은 해외 부스를 누비고 다녔다. 지난해 주빈국으로 ‘대박’을 터트린 독일은 참여 화랑을 두 배로 했고, 한-프랑스 수교 120주년을 맞아 올해 주빈국으로 선정된 프랑스는 대형 설치작품까지 전시하며 미술 애호가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스페인 아트페어 ‘아르코’는 내년을 한국의 해로 선정해 국내 화랑과의 접촉 면적을 넓혔다.
국내외 거대 화랑의 틈바구니에서 작품성만으로 발길을 모으는 작은 갤러리도 있었다. 갤러리 인데코의 부스는 화가 김정자씨의 아프리카 풍경화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김씨는 아프리카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에서 25년을 지내고 2년 전 귀국했다. 당연히 국내 미술계에는 생소한 이름이다. 천경자의 아프리카 스케치에서 보았던 경쾌한 선을 색깔로 되살린 그의 그림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소박하게 담고 있다. “가봉에 있을 때 서울에서 개인전을 했는데 몇몇 사람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죠. 야자나무와 망고 등에 담은 아프리카의 온기를 다수에게 전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요. 가슴 두근거리며 본 풍경을 모두 표현해야 할 텐데….”
“누구나 편하게 미술품 고를 수 있도록"
이처럼 원색으로 수놓은 아프리카를 만나게 하는 KIAF. 김정자씨의 개인전으로 마련한 갤러리 인데코 부스에 들어온 한 그림 애호가는 “색이 부르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원색의 매력에 푹 빠져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관람인도 적지 않았다. 전시 소개책자에 실린 김씨의 아프리카 그림에 반했다는 갤러리 인데코의 백현주 실장은 “아직 국내에 이름이 많이 알려진 화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작품의 진가를 더 잘 알 것 같아 부스를 개인 전시장으로 꾸몄다. 이런 국내 화가가 있다는 것을 KIAF를 통해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보람 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올해 KIAF만으로 미술품 유통 방식의 획기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1986년에 시작된 화랑예술제를 떠올리면 20년의 아트페어 역사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수두룩한 탓이다. 여전히 작가의 폭이 제한돼 있고, 미술품 대중화를 위한 고민도 모자란다. 다만 해가 갈수록 KIAF의 질적, 양적 성장이 뚜렷한 것만은 사실이다. 프랑스 주스 앙테르프리즈 갤러리의 매튜 파리스 큐레이터는 이렇게 말했다. “아시아 시장에서 서울의 위상이 강화돼간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누구나 편하게 미술품을 구입하는 분위기를 만들면 국제 시장에서 인정받는 한국 작가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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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가격지수 화가는 박수근일반인 접근 어려운 고가품 거래 대신 쌈짓돈으로 아트페어를
요즘 중국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은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다. 홍콩의 소더비나 크리스티의 경매에서 중국 고미술품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진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중국 내에 20여 개의 경매회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설립되어 동아시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의 미술품 경매회사들은 황용핑이나 구원다·쉬삥·팡리쥔 등의 중국 현대미술가들을 세계 시장에 진입시켜 뭉칫돈을 챙기고 있다. 여기에 전세계에 거주하는 화교들이 주요 컬렉터 구실을 하면서 주가를 올리기도 한다.
이렇듯 중국 미술품은 밀실에서 나와 시장에 진입하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미술작품이 시장에 진입해 딜러와 컬렉터들을 만나면서 생명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견줘 국내의 미술품 거래는 투명하게 이뤄지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가나아트에서 설립한 서울옥션이 다각적인 미술품 거래를 추구하고 있지만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국제적인 경매회사들과 제휴하거나 온라인 서비스 등으로 미술품 거래 종합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성과로 꼽힌다.
여전히 음성적 거래가 주도하는 국내 미술품 시장. 여기에서 미술품 구입은 돈이 되는 것일까. 최근 ‘아트펀드’가 주목받으면서 미술품 수익률 분석 자료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서울옥션이 지난 2월 발표한 7년 동안의 거래 자료에 따르면 스타급 미술가 15명의 작품 285점은 연 12%의 수익률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가격지수로 따져보면, 1999년을 100으로 볼 때 2005년의 지수는 197.9로 나왔다. 그러니까 1999년 1억원에 산 작품의 2005년 말 가격은 1억9790만원가량 되는 셈이다.
물론 근·현대 대표작가의 작품은 보통 사람들이 넘볼 수 없는 가격이다. 작가별 가격지수가 가장 높은 박수근의 작품은 무려 9억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일반인이 배당 수익도 없이 거래 수수료가 10% 안팎인 미술품 경매에 선뜻 나서기는 어렵다. 게다가 미술품은 주식이나 부동산 등과 달리 환금성이 떨어지는 투자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만일 미술품에 관심이 있고 가치 있는 투자를 하고 싶다면 아트페어를 둘러보는 게 좋을 듯하다. 세계적 반열에 오를 작가를 ‘쌈짓돈’으로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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