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미술, 자연을 만나다

346
등록 : 2001-02-14 00:00 수정 :

크게 작게

전시장 밖으로 뛰쳐나간 환경미술… 돌, 나무, 날씨까지 표현의 소재로

사진/이호상의 <관조>.
아직은 날이 선 겨울 바람이 더욱 맵게 불어오는 북한강 둔치가 바로 전시장이었다. 전시회 팻말을 따라 작품을 찾아가려면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불을 헤치기도 해야 하고, 한 작품을 구경하고 나면 다음 작품까지 수십미터를 걷기도 해야 했다. 띄엄띄엄 놓여 있는 작품을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전시회’라고 하면 으레 밝은 할로겐 불빛이 왁스칠한 바닥에 아롱지는 근사한 화랑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당최 이 전시회는 그런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깨버리는 데 초점이 맞춰 있는 듯했다. 이제는 야외에서 전시를 하는 게 흔해진 편이라고 해도 이 추운 정월 대보름께, 그것도 잔디가 곱게 깔린 정원이 아니라 쌩쌩 부는 칼바람을 온몸으로 그대로 맞아가며 돌아다녀야 하는 강가에서 전시회라니.

‘바깥 미술회’의 고집?

넘실거리는 북한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기도 가평군 대성리의 화랑포 강변에서 요즘 열리고 있는 ‘바깥미술회’의 전시회는 그렇게 이색적인 경험을 요구한다. 대성리 국민관광단지 주차장에 연결된 숲 길에서 시작해 강가를 한바퀴 돌다보면 구석구석 따로 떨어져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화살표를 따라가다 만나는 첫번째 작품은 김언경씨의 <눈이 와서 좋은 아침>. 나지막한 나무에 빨강, 노랑 천가지를 매단 설치작품이다. 그리고 길을 따라 몇발짝 더 들어가면 이번엔 나무에 연탄재를 주렁주렁 매단 양상근씨의 작품이 나온다. 연탄재치고는 조금 작다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짜 연탄재가 아니라 흙으로 정성껏 모양을 만들어 구운 가짜 연탄재다.


그 다음에는 아예 작품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찾기가 어렵다. 푯말에는 작가와 작품제목이 적혀 있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도대체 작품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잘못됐나 싶어 다시 푯말을 보면 “임충재작, <까치는 나무를 꺾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글귀를 읽은 뒤 다시 고개를 들면 그제야 어렵사리 작품을 찾을 수 있다. 오순도순 이웃한 나무 세 그루에 달려 있는 새둥지 세개가 바로 작품인 것이다. 물론 새가 지은 진짜 새둥지가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 얹어놓은 가짜 새집이다. 그렇지만 작품제목을 이해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머리를 굴려야 한다. 까치가 집을 지을 때 어떻게 할까? 까치는 나뭇가지를 물어다 얼기설기 엮는다. 그러나 결코 잔가지라도 생가지를 꺾는 법은 없다. 저절로 떨어진 나뭇가지만을 주어올 뿐이다. 제 필요에 따라 나뭇가지를 꺾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게 작품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제의식은 바로 바깥미술회가 표방하는 예술적 지향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전시회는 바깥미술회의 스물한번째 정기전이다. 전시회 앞에 붙어 있는 수치는 관람객에게는 별 상관없는 작가들끼리의 의미일 뿐이지만 이 전시회에 붙어 있는 ‘스물한번째’의 의미는 사실 각별하다. 1981년 첫 번째 정기전 이후 바깥미술회는 스무해 동안 빠짐없이 전시회를 열어 환경미술을 알려왔다. 미술계에서 특정학교 출신 작가들의 모임을 빼면 20년 넘게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명맥을 이어온 그룹은 ‘현실과 발언’ 등의 몇몇 집단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바깥미술회의 고집은 미술계에선 유명한 편이다. 다만 언론 홍보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고, 전시장도 지방이어서 대중매체에서 좀처럼 다룬 적이 없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전성기에 비해 참여 작가의 수는 줄었지만 사실 바깥미술회의 이력은 그리 만만치 않다. 지금은 거물급이 된 육근병, 윤범모씨도 이들 전시회에 참여했고 한때는 전시 참여작가가 100명을 넘었던 적도 있었다. 이제 규모는 비록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서울도 아닌 지방 노천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20여명의 작가들이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열정은 창립 초기나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감상법도 달라야 한다

사진/최운영의 <새롭게 돋아나는 것들>(위). 유재흥의 <은밀힌 잠식>.

이들이 내세우는 ‘환경미술’은 사실 이름처럼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유파는 아니다. 일단 전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경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을 도구화해왔던 현대문명에 대한 반성과 자연성을 회복하자는 소명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자연미술, 또는 환경미술이란 개념이다. 환경미술은 온갖 첨단기법과 재료를 동원하는 요즘 미술과는 동떨어져 자연친화적인 미술, 자연에서 추출한 재료로 다시 자연으로 쉽게 환원될 수 있는 작품을 통해 공해와 오염에 찌든 현실을 비판한다. 현재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환경미술 또는 자연미술을 하는 그룹은 ‘바깥미술회’와 공주지역에 기반을 둔 ‘야투’가 대표적이다. 두 그룹 모두 지역에 터전을 잡고 활동해왔고 외부사람들에게는 마치 일종의 종교처럼 비칠 정도로 공동체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들은 미술계에서 늘 아웃사이더로 여겨져왔다.

사실 바깥미술회가 처음 출범했던 80년대 초반부터 이들이 환경미술, 자연미술을 표방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그야말로 ‘바깥’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처음에는 일단 도전적인 의식으로 대지 속으로 뛰쳐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가장 추워서 전시회를 열기에는 가장 힘드는 겨울을 골라 전시회를 열었다. 첫 번째 전시회도 바로 이곳 대성리에서 열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담아내는 가치관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왔다. 회원들이 뛰쳐나간 바깥은 온갖 환경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절로 환경 문제를 직시하고 인식하면서 이들의 작품세계는 자연스럽게 환경친화와 문명비판으로 방향이 잡혔다.

이번 전시회는 바깥미술회의 정기전이지만 같이 환경미술 작업을 해온 야투의 멤버들도 초대작가로 참여했다. 두 그룹은 성향은 비슷해도 작품 경향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야투가 자연물 거의 그대로의 소재를 최소한의 가공으로 이용하는 등 보다 철저한 환경주의를 주장하는 데 비해 바깥미술회는 소재를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하면서 주제에서 환경주의를 강조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는 우리나라 환경미술의 현재 모습과 흐름을 견학할 수 있는 기회다.

사진/김광우씨의 <유유유유무무무무>.
바깥에서 열리는 노천전시이기 때문에 관람법도 일반 전시회는 다른 요령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도 환경미술 작품은 전시장이 바뀌어도 같은 미적 아우라를 주는 일반 실내 미술품과는 달리 특정한 장소와 환경을 해석해 만든 작품들이다. 작가들이 현장을 사전에 답사하고 나름의 시각으로 해석해 맘에 드는 나무나 장소를 골라 그곳에서 얻은 미술적 영감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때문에 작품들은 모두 1회용이다. 작품도 단지 조형물 그 자체만이 아니라 조형물 주변의 나무와 돌 등의 지형지물, 그리고 분위기를 연출하는 겨울 날씨까지 모두 작품의 일부라는 점을 감안해서 감상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그해그해 자연환경의 변화가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한다. 전시장인 화랑포 해변은 연이어 두해 동안 여름 물난리로 큰 물이 휩쓸고 지나간 둔치다. 지난해에는 물에 떠내려온 쓰레기들이 가득했고 작가들은 그 쓰레기들을 이용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올해는 그 쓰레기가 다시 쓸려내려가 강변 고유의 자연물들을 이용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강가’라는 동일한 전시공간이자 소재를 작가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는 지를 비교해보는 것도 감상 재미를 더해주는 포인트다.

겨울 강변에서 얻는 즐거움

사진/고승현의 <또 다른 한마리의 물고기>.
김광우씨는 나무와 흙, 천연안료를 이용해 나무 줄기에 기둥을 덧대 자연과 인간을 잇는 나무를 의자로 해석한 작품을 선보였고, 이호상씨는 강물 속에 의자를 세운 뒤 비닐 바코드를 반쯤 물에 잠기게 설치한 작품을 통해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문명을 고발한다. 이응우씨는 얼핏 보기에 마치 모닥불 흔적처럼 보이는 <자연요소와 함께 한 작업방법2>를 출품했다. 이 작품은 눈 위에서 나무를 태워 그 열로 눈이 녹는 과정까지 모두 작품이 되는 이색 작품이다. 홍수에 기둥이 꺾여버린 바람에 죽은 고목 옆으로 나무 기둥을 세워 점점 강물로 빠져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최성열씨의 <생태계의 저항>은 인간의 오만이 부른 재앙에 저항하는 생태계의 메카니즘을 형상화했다.

세련되고 산뜻한 요즘 미술 조류에 익숙한 눈으로 보면 이들의 작품은 어찌보면 미숙해보일 정도로 꾸밈이 부족해 보인다. 또한 추상적 담론에 치우쳐 미적 가치보다는 메시지만 강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이 자연미술 또는 환경미술의 현재 모습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어렵고 형이상학적 분석을 떠나서도 일단 각박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을 거닐면서 작품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일 테고 이 점은 분명 다른 전시회에서는 얻을 수 없는 재미다. 그리고 면면히 이어져온 자연미술의 자생성과 삶의 공동체적 가치를 확인해보는 것도 모처럼 찾아간 겨울 강변에서 얻는 즐거움일 것이다.

2월17일까지 경기도 가평군 대성리 국민관광단지. 031-531-8039, 016-220-8038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