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대지미술의 생과 멸

346
등록 : 2001-02-14 00:00 수정 :

크게 작게

사진/크리스토 <골짜기의 커튼>(위). 로버트 스미드슨 <나선형 둑>.
바깥미술회와 야투 등 국내 환경미술 그룹들은 자연 공간을 그대로 전시공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서구의 대지미술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대지미술과는 분명히 다르다. 국내 환경미술가들의 작품이 동양적 자연관을 바탕에 두고 자연과 작품이 융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데 비해 서구의 대지미술은 자연을 대상으로 삼는 서구 미술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국내 환경미술 작가들의 작품은 마치 나무나 돌처럼 자연의 일부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서양 대지미술 작가들의 작품은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힘을 그대로 형상화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엄청난 크기의 작품들이 많다.

이 대지미술은 처음 ‘아르테 포베라’, 즉 ‘가난한 예술’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시작됐다. 가난한 화가들이 자연물이나 흙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대지미술로 발전한 이후로는 가난과는 거리가 완전히 멀어졌다. 엄청난 비용을 들이는 거대이벤트로 바뀐 것이다.

대지미술은 아르테 포베라처럼 흙을 전시장 안으로 들여오는 대신 흙이 있는 현장으로 뛰쳐나가 현장을 작품으로 삼았다. 땅과 흙, 나무와 돌 등을 작품에 그대로 이용해 한번 만들고 나면 다시는 만들 수 없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대지미술의 특징이다. 사막과 산, 호수, 설원 등의 자연에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작품 그 자체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사진뿐이다. 그래서 아이디어 스케치와 사진이 작품으로 판매된다.

대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는 지난 92년 국내에서도 스케치 개인전을 열었던 불가리아 출신의 크리스토. 크리스토는 건축물을 비닐로 포장하는 이색작업으로 유명한데 85년 프랑스 파리 센강의 퐁네프 다리를 비닐로 포장한 작업이 특히 화제가 됐다. 한번 촬영하고 나면 끝나버리는 작업이었지만 10년 계획 끝에 무려 30억원을 들여 다리 전체를 포장했다. 그의 또다른 작품 <달리는 울타리> 역시 광활한 대지에 끝없이 이어지는 울타리를 만드는 작업이었는데 역시 20억원가량이 들었다. 이 밖에 <골짜기의 커튼>은 미국 콜로라도의 리플 크릭이란 계곡에 커튼을 설치한 작품으로 1만8400제곱미터의 천이 소요됐는데 하루 만에 철거했다. 크리스토는 규모만큼 천문학적인 제작비용을 대기 위해 스케치를 판매하고 기삿거리에 허덕이는 매스컴을 활용해 홍보효과를 노리는 광고주들을 모았다. 이런 전략이 성공해 크리스토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대지미술의 또다른 대표적 작가는 로버트 스미드슨이다. 그의 대표작은 미국 유타주의 그레이트솔트 호수에 설치한 <나선형 둑>(1970)이다. 폭 4.5m 길이가 450m나 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제작과정이 거대토목공사 수준이었다. 이 밖에 다른 대지미술 작품으로는 뉴욕 센트럴 파크에 구멍을 파고 다시 구멍을 메우는 과정 전체가 작품이었던 올덴버그의 <조각적 환경>과 2400여t의 호산암과 사암을 파헤쳐 만든 마이클 하이저의 <이중부정> 등이 유명하다.

이처럼 대지미술은 규모와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으로 대중의 관심을 쉽께 끌 수 있었던 동시에 뜬 만큼 빨리 가라앉았다. 우선 환경론자들이 반대하고 나섰고 처음에는 놀라움으로 신기해하던 대중들도 거듭되는 이벤트에 식상해하면서 생명력을 잃고 만 것이다. 그래서 대지미술은 미술계에서 사라져버렸고, 이제는 사진으로만 당시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