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를 쏜 전세계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작품집 <불찬성의 디자인>…중동 분쟁, 미디어, 유전자조작식품 등 정치적·사회적 이슈에 저항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우연치 않게 <불찬성의 디자인>(The Design of Dissent, 지식의 숲 펴냄)을 손에 들었을 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느 순간 불편함에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 성미산 아래 옥탑방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책이었다. 주인의 품에 안기지 못한 책의 운명만큼이나 ‘가혹한’ 디자인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시대의 유령이 떠도는 듯한 숲이었다.
그것은 불편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절규와도 같았다. 한동안 구석에 방치했던 불찬성의 이미지들을 책의 주인에게 넘기려는 순간, 불편함 너머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가슴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다시 불편함을 즐기기로 했다. “위협받는 민주주의에 저항하는 방법" 미국 그래픽 디자이너의 화신으로 불리는 밀턴 글레이저와 보스니아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마르코 일리치가 엮은 <불찬성의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사회적 발언이 함축적으로 담긴 작품집이다. 두 사람의 관심사는 불찬성의 공유로 끝나지 않는다. 시대에 대한 저항과 반대의 뜻을 담은 이미지들을 통해 세상을 보고 읽도록 하면서 개선과 교정을 촉구하는 대열에 합류할 것을 강력하게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400여 작품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오감을 자극하고 삶에 활력이 되기는 쉽지 않다. 강렬한 색상과 상징적 이미지에 숨어 있는 해학적 코드 역시 자극적이어서 마냥 웃음을 머금게 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세계 도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아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나 평택 미국기지 이전 반대 집회를 남의 일로 여긴다면 피로 물든 공산주의와 이슬람 사회의 비극의 실체가 다가설 통로가 마땅치 않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지구적 동시성이 구현되면서 소통 통로가 확장되고, 다양한 이미지에 의미를 담는 블로거들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갈등과 대립에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않는다면 단 1초도 첨예한 사안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지구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전쟁과 환경 등의 문제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불찬성에서 비롯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우리에게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은 없는 것일까. 아무리 반대자들에게 총과 칼 혹은 곤봉 세례가 난무한다 할지라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불찬성의 이미지들은 대안이 될 수 있는 반대에 관한 신념을 오롯이 드러낸다. 다시 말해 반대의 긍정적인 힘을 발견하는 것이다. <불찬성의 디자인>을 엮은 밀턴 글레이저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과정에서 불찬성을 표현하는 게 중요한 사안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픽 디자인은 분명히 행동주의의 한 형태이다. 디자이너가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책임감을 가지고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위협받는 민주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 디자이너의 메시지에 다가선다면 나와 남의 경계가 순식간에 무너진다. 중동 평화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오시 레멜의 작품을 마주하면 대립의 부조리를 단박에 읽을 수밖에 없다. 유혈 혈쟁을 상징하는 욕조에 담긴 새빨간 악수하는 잘린 손 등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비극적 분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9·11 테러의 배경이 궁금하다면 피터 쿠퍼의 <줄무늬와 별>에서 본질을 꿰뚫는 혜안을 얻을 수 있다. 미국 <코믹저널>의 특별 애국주의판을 위해 제작된 만화는 폭력이 폭력을 낳는 과정, 테러리즘과 전쟁의 악순환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불찬성의 이미지들이 명분 없는 전쟁과 대립 등 거대 담론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들은 작품을 통해 ‘세계 시민’으로 인간의 문제에 공감할 것을 권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도 목소리를 낸다. 팡첸의 <승리>는 승리 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우리를 외로이 증언한다. 오로지 ‘V’를 그려낼 두 손가락을 위해 나머지 세 손가락을 잃어버리는 이들의 실상을 아프게 보여주는 것이다. 유전자조작식품(GMO)도 불찬성의 디자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레크 부이니의 은 상징적 충격이다. 먹음직스런 레몬에서 털이 돋아나는 이미지는 GMO의 위험한 미래를 예견하는 듯하다.
잃어버린 손가락이 ‘반대’를 일깨운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반대를 외치는 디자인. 정치·사회적 이슈에 관련된 유명 디자인을 한데 모은 <불찬성의 디자인>의 표적은 ‘미국’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설픈 딴죽걸기가 아니다. 내로라하는 디자이너의 작품들은 보는 이들의 무뎌진 감각에 새로운 신경세포를 이식하고, 바뀌어야 할 현실이 무엇인지를 느낌으로 깨닫게 한다.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디자인의 원형을 제시하는 셈이다. 물론 지은이들의 작품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해설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불찬성의 디자인, 그 은밀한 매력에 빠지다 보면 우리 안에서 짓눌리는 반대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느 누가 돌아보면 사람이 있고 세상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모를까. <불찬성의 디자인>에 실린 이미지들은 지난 10여 년을 주로 담고 있지만 뿌리는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문제는 그것이 과거의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과 갈등, 종교, 식품, 미디어 등에 제기되는 메시지는 오늘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충격과 역설의 디자인은 우리 시대의 쟁점을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반대에 정당성을 심어주고 있다. 잠시 불편함을 즐긴다면세계와 나의 합일을 경험할 수도 있다. “나는 반대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비단 소수 그래픽 디자이너의 경구만이 아닐 것이다.

불찬성의 이미지들은 인권과 평화, 환경 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유전자 조작식품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관계.
그것은 불편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절규와도 같았다. 한동안 구석에 방치했던 불찬성의 이미지들을 책의 주인에게 넘기려는 순간, 불편함 너머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가슴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다시 불편함을 즐기기로 했다. “위협받는 민주주의에 저항하는 방법" 미국 그래픽 디자이너의 화신으로 불리는 밀턴 글레이저와 보스니아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마르코 일리치가 엮은 <불찬성의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사회적 발언이 함축적으로 담긴 작품집이다. 두 사람의 관심사는 불찬성의 공유로 끝나지 않는다. 시대에 대한 저항과 반대의 뜻을 담은 이미지들을 통해 세상을 보고 읽도록 하면서 개선과 교정을 촉구하는 대열에 합류할 것을 강력하게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400여 작품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오감을 자극하고 삶에 활력이 되기는 쉽지 않다. 강렬한 색상과 상징적 이미지에 숨어 있는 해학적 코드 역시 자극적이어서 마냥 웃음을 머금게 하지도 않는다.

9·11테러의 원인들을 담은 작품들.

미국은 불찬성의 주요 대상이다. 부시의 입에 석유를 묻혀 뱀파이어 이미지를 만든 작품과 기계화에 대항할 것을 권하는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