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은 SF영화 제작 전성시대… 규모는 못따라가도 특색있는 맛을 보여주겠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배경의 SF영화들 중에서 영화팬들에게 가장 선명하게 기억되는 시간적 배경은 아마 2001년일 것이다. SF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제목 앞에 2001이라는 연도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1년이 밝은 올 초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거론하면서 스탠리 큐브릭이 예언한 인류의 운명과 오늘의 현실을 비교하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2001년은 한국의 SF영화에서도 기억될 만한 해가 될 것 같다. 엄청난 자본력과 기술력이라는 제작조건 때문에 할리우드의 전유물이라고만 여겨왔던 SF영화 제작이 충무로에서도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2009…>, 광고제작 노하우 활용
우리 손으로 만드는 SF영화라는 건 제작진뿐 아니라 관객으로서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거대한 불길이 도시 전체를 빨아들이고 <매트릭스>처럼 총알을 우아하게 밀어내는 한국 배우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걸까? 아직 이런 기대는 이른 것 같다. 수십년간 축적된 노하우를 가지고 특수효과 하나에도 수백만달러를 투자하는 할리우드식 스펙터클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한국형 SF에 실망할 필요도 없다. 제작자들은 적은(?) 자본으로 할리우드와는 다른 색깔의 SF로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기술과 상상력의 날을 벼르고 있다.
이 가운데 먼저 움직이고 있는 작품으로 신인 이시명 감독의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있다. 1월 말 촬영에 들어간 이 작품은 이제까지 한국영화에서는 시나리오 완성 외에 전무하다시피했던 프리프로덕션 과정에 3년 가까이 공을 들였다. 한국이 일본 식민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상황을 전제로 2009년, 일본 제3의 도시가 된 경성에서 벌어지는 액션스릴러물이다. 후레이센진(不令鮮人)이라는 반정부집단의 테러를 진압하면서 JBI(일본의 FBI?) 특수수사요원인 사카모토(장동건)는 이들의 테러방식에 의문을 품게 되고 이 사건에 얽혀 있는 일본 거물급 정치가의 음모를 발견한다. 사카모토는 한 세기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음모의 실체를 밝히면서 독립된 과거로부터 망각된 정체성을 찾게 된다. 이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이순신 장군 대신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자리잡게 될 광화문 네거리의 2009년 풍경. 일본 다국적 기업의 간판으로 도배될 광화문 네거리는 미니어처와 컴퓨터그래픽(CG)로 재현된다. 거대한 화물선과 시간의 문이 숨겨진 산 전체가 무너져내리는 장면도 이 작품의 특수효과가 신경쓰는 부분이다. <매트릭스>에서 대리석 벽을 산산조각낸 특수효과 탄환을 이용한 액션신도 각별히 신경쓰는 부분. 그러나 “특수효과에 의존한 튀는 볼거리보다는 드라마 안에서 완벽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이펙트의 밀도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게 이석연 특수효과 감독의 계획이다. 이석연 감독이 있는 아트워크팀은 특수효과기술이 영화보다 훨씬 앞선 광고제작을 오랫동안 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이 작품에서 십분 발휘할 예정이다. 특수촬영을 비롯해 다른 영화의 세배에 이르는 120회 촬영을 계획하고 있는 이 작품은 가을쯤 만날 수 있다. <성냥팔이…>, 콜롬부스의 달걀 세우는 심정
베일에 쌓였던 TTL소녀를 주연으로 발탁해 화제가 됐던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도 비슷한 시기에 제작에 들어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될 작품. 게임이라는 가상현실에서 벌어지는 액션을 담는다는 컨셉이 최근 개봉한 일본영화 <아바론>과 비슷하다. 중국집 배달원으로 허구한날 게임방에서 시간을 때우는 주(김현성)는 편의점 앞에서 만난 성냥팔이 소녀에게 라이터를 산다. 라이터에 쓰여 있는 전화번호를 무심코 누른 주에게 성소 재림 접속 안내가 나오고 그는 성소(임은경)를 구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게임의 세계에 빨려든다는 이야기. 현재 촬영이 진행중인 <화산고>를 비롯,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이 영화의 CG를 책임지는 장성호 감독은 한달 전 <아바론>을 보고 허탈감에 빠졌다고 한다.
3차원의 인물이 2차원적으로 변한다거나 인물이 쪼개지듯 부서져나간다거나 하는 <아바론>의 많은 CG장면들이 1년 전부터 그가 구상해오던 그림들과 거의 흡사했던 것. <아바론>은 막대한 자본없이 창의력만으로도 SF가 얼마나 세련돼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진의 인물을 따라가는,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런 식의 동선이 불가능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CG로 감쪽같이 만들어냈던 장성호 감독팀은 “이제는 <아바론>과도 차별을 둘 수 있는 게임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콜럼버스의 달걀을 세우는 심정”으로 묘안을 짜내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다른 SF영화에 비해 실사촬영이 강조되는 이 영화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수백여종의 모형총기와 실제 총기들, 그리고 독일제 대전차병기까지 동원된 격투신이다. 실제 격투신에 CG 등 특수효과가 덧입혀져 판타지적인 가상공간을 연출한다는 의도다.
<내츄럴 시티>, 동양화의 정서를
앞선 두 영화가 SF장르에 걸쳐져 있는 스릴러와 판타지를 구현하는 반면 <내츄럴 시티>는 좀더 SF적인 색깔에 충실한 작품이다. 잠수함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빼어난 특수효과로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던 민병천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생명공학을 이용한 인간복제가 만연되는 2080년, 대규모 지진으로 폐허가 된 지구에서 재건되고 있는 신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이보그와 10년 주기의 사이보그 수명을 제거해야 하는 경찰 사이에서 싹트는 사랑이 이야기의 큰 줄거리다. 언뜻 <블레이드 러너>가 떠오르는 상황 설정이다. 민 감독 역시 이 작품과 <공각기동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나리오 작업를 포함해 오랜 기간의 프리프로덕션에 공을 들이면서 <내츄럴 시티>의 민 감독은 “어떻게 하면 할리우드의 블럭버스터 SF영화들을 통해 만들어진 선입관을 깰 수 있을까”에 긴 시간을 고민했다. 민씨는 할리우드의 현란하고 꽉 찬 화면 대신 여백의 미를 가진 동양적인 선으로 거대한 미래도시의 실루엣을 살리기로 했다. 황량하고 텅 빈 폐허와 부산하고 화려한 신도시를 그윽하게 대비시키면서 한폭의 동양화 같은 정서를 깊이 깐다는 의도다. CG나 특수효과 측면에서도 “고난도 테크놀로지를 보여주겠다는 야심보다는 우리 기술이 가능한 수준에서 완벽하게, 그리고 절제있게 활용하면서 화면의 내실을 기하겠다”는 생각이다. 타이포 개념을 도입해 미래에 사용될 법한 글자체를 개발하거나, 화면 앞에 제목과 등장인물의 이름이 나오는 1분30초 량의 타이틀 백 작업팀을 따로 꾸려 3개월 동안 작업하는 등 디테일에 각별히 신경쓰는 것도 할리우드식 규모의 압도와는 다른 성취를 보여주겠다는 민 감독의 전략이다. 유지태, 이재은이 주연하며 올해 말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될 작품으로 <접속> <텔미썸딩>의 장윤현 감독이 만드는 <테슬라>와, 정윤수 감독의 데뷔작 <베일>이 있다. 현재를 배경으로 하는 <테슬라>가 SF인 이유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부터 여전사가 현재로 오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고 있기 때문. 아직 시나리오 완성단계중이라 구체적인 그림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장 감독에 따르면 “SF형식을 빌려 현재를 사는 우리가 미래나 과거처럼 다른 세계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할 것인가에 대한 의미를 묻는 영화”다. “공간이동이라는 모티브를 형상화하기 위해 양자역학이나 평행우주론 같은 과학이론을 도입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판타지는 아닐 것”이라는 게 장 감독의 말. 대신 과학기술에 대한 흥미나 관객의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즐거움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둘 것이라고 한다. 2020년을 배경으로 하는 <베일>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인터시티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납치극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을 그릴 예정이다. 이 작품 역시 세트와 미니어처, CG 등에 많은 힘이 들어가게 되지만 비주얼 못지않게 과장된 효과음 등 사운드의 효과를 극대화해 독특한 색깔을 찾겠다는 게 전략.
이 밖에 <제노사이드>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현인류와 진화된 신인류간에 벌어지는 충돌을 그리는 대형 액션스릴러물이다. 한석규를 주인공으로 올 여름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지만 촬영과 후반작업의 완성도를 위해 2002년 말이나 2003년 초로 느지막이 개봉계획을 잡고 있다.
현재 개봉예정인 SF영화들의 제작비를 합하면 300억원에 이른다. 할리우드와 비교한다면 한편 값도 안 될 수준이겠지만 국내 영화판의 규모를 따지면 눈이 휘둥그래질 숫자다. <제노사이드>를 빼면 모두 올해나 내년 초 개봉을 경쟁하게 될 이 작품들 가운데 몇편은 투자자의 눈물을 쏙 빼놓을 것이고, 그중 한편은 어쩌면 관객동원기록을 깰 수도 있을 것이다. 한두편쯤은 관객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얻으면서 한국영화 발전에 한 단계의 든든한 주춧돌을 올려놓기를 바라는 건 아마도 모든 관객의 바람일 게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이 가운데 먼저 움직이고 있는 작품으로 신인 이시명 감독의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있다. 1월 말 촬영에 들어간 이 작품은 이제까지 한국영화에서는 시나리오 완성 외에 전무하다시피했던 프리프로덕션 과정에 3년 가까이 공을 들였다. 한국이 일본 식민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상황을 전제로 2009년, 일본 제3의 도시가 된 경성에서 벌어지는 액션스릴러물이다. 후레이센진(不令鮮人)이라는 반정부집단의 테러를 진압하면서 JBI(일본의 FBI?) 특수수사요원인 사카모토(장동건)는 이들의 테러방식에 의문을 품게 되고 이 사건에 얽혀 있는 일본 거물급 정치가의 음모를 발견한다. 사카모토는 한 세기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음모의 실체를 밝히면서 독립된 과거로부터 망각된 정체성을 찾게 된다. 이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이순신 장군 대신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자리잡게 될 광화문 네거리의 2009년 풍경. 일본 다국적 기업의 간판으로 도배될 광화문 네거리는 미니어처와 컴퓨터그래픽(CG)로 재현된다. 거대한 화물선과 시간의 문이 숨겨진 산 전체가 무너져내리는 장면도 이 작품의 특수효과가 신경쓰는 부분이다. <매트릭스>에서 대리석 벽을 산산조각낸 특수효과 탄환을 이용한 액션신도 각별히 신경쓰는 부분. 그러나 “특수효과에 의존한 튀는 볼거리보다는 드라마 안에서 완벽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이펙트의 밀도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게 이석연 특수효과 감독의 계획이다. 이석연 감독이 있는 아트워크팀은 특수효과기술이 영화보다 훨씬 앞선 광고제작을 오랫동안 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이 작품에서 십분 발휘할 예정이다. 특수촬영을 비롯해 다른 영화의 세배에 이르는 120회 촬영을 계획하고 있는 이 작품은 가을쯤 만날 수 있다. <성냥팔이…>, 콜롬부스의 달걀 세우는 심정

사진/영화 는 세트와 미니어처. CG의 공조시스템을 긴밀히 구축하고 있다.

사진/영화 <베일>에서 CG로 완성한 내부공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