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섹스를 매개로 질퍽대는 이유는 대부분 섹스 자체보다 섹스하는 이와의 관계 때문이다. 하지 않은 사이라면 간단한 문제가 하는 사이라면 꽤 복잡해진다. 양해 없이 약속에 늦거나, 누구 뒷담화를 열심히 깠는데 무성의하다거나, 주말 내내 전화 한 통 없거나, 이메일과 문자에 재깍 답신을 안 하거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도 나와 섹스하는 사람이 이랬다면 쉽게 넘어가기 어렵다. 그 결과 섹스까지 꺼려지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이 생긴다.
섹스는 정녕 독점욕과 지배욕을 낳는가? 한때 ‘떼사랑’(다자 연애, 경우에 따라 다자 섹스)을 주제로 기사 기획을 했더랬다. 이를 실천했거나 옹호한다는 몇몇을 취재한 결과, 이들이 한 건, 또 할 수 있는 건, 엄밀히 말해 ‘시간차 연애’거나 취기를 빌려 도모한 ‘이벤트’였다는 걸 알게 됐다.
제일 어이없는 건 ‘그(녀) 몰래 떼사랑’을 한 경우였는데, 자기 바람기를 포장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나도 그런 ‘실험’의 유혹에 노출돼 있으니, 가끔 “우리 그때 봤던 영화 어쩌구…” “전에 갔던 호텔 저쩌구…” 하다가 화들짝 놀라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크게 반성했다. 실험을? 아니 누구랑 갔는지조차 헷갈리는 나의 기억력 없음을. 그러다 파트너를 제3자와 ‘공유’하는 상상을 해봤다(사실 벌써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무섬증에 빠졌다. 그가 나보다 제3자를 더 좋아하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공포가 깊을수록 분노가 격렬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떼사랑은 이론상 ‘그룹 섹스’일 수도 있다. 하나 언제 어디서든 더 열중하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 지속적인 떼사랑이 가능하려면 평등 의식이 아니라 고른 배려가 훨씬 중요하다. 하지만 한 명을 배려하며 섹스(관계)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한꺼번에 두 명, 혹은 그 이상을 어찌 일일이 배려하며 하겠는가. 엄청나게 유능하거나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그리하여 나의 결론은 “떼사랑은 없다”였다. 기사는 알아서 안 썼다. 그럼 독점적이고 지배적인 일 대 일 관계가 떼사랑보다 낫다고 할수 있나? 어떤 것이 본성에 부합할까? 이 칼럼을 시작할 즈음 누군가 “화끈하게 써봐. 셋이 하는 ‘쓰리썸’ 같은 거”를 주문할 때, 어떤 종류의 억압된 욕망을 엿보았다. 시간차 섹스를 두고 쓰리썸을 해봤다고 주장한 글도 봤는데, 마치 “우와, 라스베이거스에 갔더니 이렇더라” 유의 여행기로 읽혔다. 둘 초과의 사랑, 떼사랑은 하면 별게 아닌데(외려 속박이 더 많은데) 안 하니까 신기한 게 아닐까. 본성이라면 이런 반응이 본성일 것이다. 재미있는 건 사람들은 독점적이고 지배적인 일 대 일 관계를 지겨워하면서 거기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벗어난 관계를 이어가는 것에도 절절 맨다. 일 대 일 연애는, 일처일부제는 우리의 본성까지 복종시킨 것일까? 이른바 제도의 내면화? 하지만 그것이 주는 ‘달콤 살벌한’ 편리함이 있기에 몸과 마음을 바쳐 너만을 사랑하겠노라 맹세한다. 그건 동시에 나만을 사랑하라는 무서운 주문이니, 이렇게 서로를 얽매어놓고서야 안심하는 가련한 동물들이다. 우리는.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떼사랑은 이론상 ‘그룹 섹스’일 수도 있다. 하나 언제 어디서든 더 열중하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 지속적인 떼사랑이 가능하려면 평등 의식이 아니라 고른 배려가 훨씬 중요하다. 하지만 한 명을 배려하며 섹스(관계)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한꺼번에 두 명, 혹은 그 이상을 어찌 일일이 배려하며 하겠는가. 엄청나게 유능하거나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그리하여 나의 결론은 “떼사랑은 없다”였다. 기사는 알아서 안 썼다. 그럼 독점적이고 지배적인 일 대 일 관계가 떼사랑보다 낫다고 할수 있나? 어떤 것이 본성에 부합할까? 이 칼럼을 시작할 즈음 누군가 “화끈하게 써봐. 셋이 하는 ‘쓰리썸’ 같은 거”를 주문할 때, 어떤 종류의 억압된 욕망을 엿보았다. 시간차 섹스를 두고 쓰리썸을 해봤다고 주장한 글도 봤는데, 마치 “우와, 라스베이거스에 갔더니 이렇더라” 유의 여행기로 읽혔다. 둘 초과의 사랑, 떼사랑은 하면 별게 아닌데(외려 속박이 더 많은데) 안 하니까 신기한 게 아닐까. 본성이라면 이런 반응이 본성일 것이다. 재미있는 건 사람들은 독점적이고 지배적인 일 대 일 관계를 지겨워하면서 거기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벗어난 관계를 이어가는 것에도 절절 맨다. 일 대 일 연애는, 일처일부제는 우리의 본성까지 복종시킨 것일까? 이른바 제도의 내면화? 하지만 그것이 주는 ‘달콤 살벌한’ 편리함이 있기에 몸과 마음을 바쳐 너만을 사랑하겠노라 맹세한다. 그건 동시에 나만을 사랑하라는 무서운 주문이니, 이렇게 서로를 얽매어놓고서야 안심하는 가련한 동물들이다. 우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