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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4차원 개그의 탄생을 축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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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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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와 위아래가 없고 웃음점조차 없는 <웃찾사>의 ‘언행일치’… 웃음의 버릇 버린 3차원 코드 개그를 한번 더 뜬금없게 만들어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만약, 어느 날 우주 저편 초강력 행성의 독재자가 나타나 지구를 정복한 뒤 TV 프로그램 중 오직 한 개의 장르만을 볼 수 있다며 뭘 선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번쩍 손들고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개그 프로그램이오!!” 그러나 못난 독재자가 오직 단 한 개의 프로그램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심각한 고민에 빠질 것이다. “<웃찾사>냐 <개그콘서트>냐, 그것이 문제로다.”

막춤, 짱구춤, 자동차춤, 시도 때도 없네


얼마 전 나를 그보다 더 심각한 고민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다. 지난 4월20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목요일 밤 거실 TV 앞에 자리를 잡고 SBS <웃찾사>를 보고 있었다. 웃다가 흘러나온 침을 닦으러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생경한 코너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한 코너, ‘언행일치’였다.

본격 4차원 개그의 시작을 알린 ‘언행일치’. 뜬금없는 말과 행동이 이어지는 4차원 개그에 걸맞게 웃음이 터져나오는 시점도 뜬금없다.(사진/ sbs제공)

분명히 재미는 있었다. 그러나 당혹스러움이 더 컸다. ‘웃음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4분 남짓하는 시간 동안 나는 대체 어디에서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은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언행일치’는 ‘왜 이래’의 이용진(아빠), 남명근(엄마), 이진호(딸?!)가 새롭게 선보인 코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언행일치가 가훈이지만 사실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가족 얘기다. 엄마가 “명심해라”고 하면 딸은 귀를 막고 못 듣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웃으며 “명심할게요”라고 말한다. 딸이 휴대전화 요금이 300만원 나왔다고 하자 엄마와 아빠는 환호한다. 그러나 곧 버럭 화를 낸다. 시도 때도 없이 엄마는 ‘후랴호, 후랴’ 막춤을 추고, 딸은 ‘자자, 아잉’ 짱구춤을 추고, 아빠는 ‘요 사사삽, 나나’ 자동차 운전대 춤을 춘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앞뒤가 없고 위아래도 없다.

같은 날 같은 시간, 연말 연예대상 시상식에 개그 프로그램 열혈 시청자 부문이 있다면 나의 가장 강력한 맞수였을 회사원 이모씨도 같은 이유로 방황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수년간 개그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시청해왔지만 어디서 웃어야 하는지 모르는 코너는 처음이었다. 내가 벌써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느꼈다.” ‘언행일치’는 이러한 충격요법으로 본격 4차원 개그의 시작을 알렸다.

최근 개그 프로그램은 몸으로 웃기는 1차원 개그와 기승전결의 틀 속에서 설정으로 웃기는 2차원 개그를 지나 웃음의 개연성 대신 코드로 찾아가는 3차원 개그까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1·2차원 개그는 상식이 있다면 누구나 웃을 수 있다. 그러나 상식과 웃음의 버릇을 과감히 버리고 뜬금없는 반전을 꾀하는 3차원 개그부터 사람을 가린다. 웃기 쉽지 않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1·2차원의 개그는 범국민 코믹 명랑만화, 3차원 이상의 개그는 ‘멋지다 마사루’류의 마니아 만화인 것이다.

3차원 개그의 대표적인 코너는 막을 내린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의 ‘제3세계’다. 이 코너는 북경오리를 한 손으로 때려잡다가 서태지와 이승철이 함께 부른 ‘울트라맨이라고 말하지 마’를 열창하고,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목소리가 틀림없는 ‘슈가’ 아유미 성대모사를 선보인다. 3차원 개그는 조사하면 다 나오는 ‘범죄의 재구성’과 ‘동방신기 흉내 하나만 내주세요’ 펀치의 ‘북두신권’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4차원 개그는 3차원 개그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 구조와 대사를 걸러낸다. 상황만 붙여놓기도 하고 의미 없는 대사만 던져놓기도 한다. 4차원 개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냥’이다. ‘언행일치’가 왜 웃기냐고 물으면 마땅한 대답이 없다. “그냥!” 웃음에 합당한 이유가 없는 것처럼 웃음의 지점에도 정답이 없다. 그냥 웃길 때 웃으면 된다. 애써 찾으려고 하면 피곤해질 뿐이다.

개그가 차원을 높여갈수록 세대차는 점점 커진다. 연령대별 흡수력의 차이 때문이다. 영구와 맹구를 그리워하는 40대 이상에게 육봉달은 낯설다. ‘언행일치’를 보면 살짝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그냥’ 웃음을 즐기는 10~20대에게는 일일이 설명하는 개그가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1차원 개그가 4차원 개그보다 재미가 없느냐, 절대 아니다. 씩씩하게 걸어가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개그는 일종의 고전이다. 개그 프로그램 애청자로서 바람이 있다면 다양한 차원의 개그 코너가 공존하는 것이다. 흰밥처럼 진득한 맛이 있는 개그와 단맛, 신맛 다 보여주는 개그가 한 밥상에 올라오면 모두 함께 웃을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나는 또 다른 4차원 개그의 도전장과 5차원 개그의 탄생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지만.)

8개월 새댁의 방귀를 끌어낸 막강한 힘

4·20 사태 이후 일주일이 지난 4월27일 목요일 밤, 역시 <웃찾사>를 시청하고 있었다. 이번주에는 지난주처럼 멍하게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의 문은 닫고 마음의 문은 활짝 열어놓았다. 그게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언행일치’를 시청했다. 역시 브레이크는 걸리지 않았고 간만에 시원하게 웃었다.

‘언행일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웃찾사> 시청자 게시판을 찾았다. 그곳에서 4차원의 시청 소감을 발견했다. “결혼한 지 8개월 된 새댁인데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얼굴이 노랗게 떠도 신랑 앞에서 방귀를 참아왔어요. 그런데 같이 언행일치를 보다가 그만… 아아, 너무 미친 듯이(?) 웃다가 그만 한방 크게 뿡도 아닌 뻥을. 에휴. 그래도 앞으로 얼굴이 노래질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언행일치 너무 잼나게 보고 있어요. 감사해요.^_^” 역시 4차원 개그의 힘은 막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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