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정규앨범 〈Endless Lay〉 들고 돌아온 뮤지션 이상은씨
흔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식어가 붙는 시기는 20대다. 20대에 대한 묘사에는 늘 에너지, 젊음, 생명력 따위의 단어가 따라다니며 그 눈부신 시대를 찬양한다. 그러나 아는지. 20대 예찬은 언제나 그 시대를 훌쩍 넘겨버린 장년이나 노년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오히려 20대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 현실에 대한 분노와 환멸 사이에서 흔들리며 터널 끝을 향해 달려간다. 터널을 벗어나고도 한참 뒤, 그 불안의 그림자가 세월에 의해 마모되고 나서야 “그래, 그땐 참 젊었어”, “그때는 뭘 해도 기운이 넘쳤잖아”라고 말하며 시행착오 투성이였던 그 시절을 넉넉히 껴안게 되는 것이다.
인기를 버리고 떠돌던 20대
이제 30줄에 들어선 뮤지션 이상은(31)씨의 20대를 내내 지배했던 심상 역시 우울이었다. “가수로 데뷔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엔터테이너가 되어 살았던 2년 동안의 삶은 무슨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졌어요. 남들은 모두 즐거워하는데 무대 한가운데의 저는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괴로웠으니까요.”
진흙탕 레슬링 경기에서 터져나오는 가학적인 환호성 같았던 인기를 훌훌 털어버리고 뉴욕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방랑하며 자신의 음악을 찾아가면서도 ‘외롭고 우울한’ 싸움은 계속됐다. 새로운 음반이 나오고 또 나와도 인사말처럼 ‘담다디’ 시절을 이야기하는 기자들 앞에서 부정의 도돌이표를 무수히 반복해야 했다. 일본에서 음악을 시작할 때 국경을 넘는 음악을 하겠다고 고집한 것에는 한국 가수를 보는 시선에 깔려 있는 은근한 무시에 대한 저항도 섞여 있었다. 한국가수 이상은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작가 이상은의 음악적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한 고민은 늘 그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밤에는 내가 디딘 땅이 우주처럼 보이는데 왜 낮이 되면 모든 것이 닫혀버리는 답답한 현실로 돌아오는 걸까, 이런 식의 답도 나오지 않는 질문이 왜 그럴까, 왜 그럴까 끝없이 이어지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죽음에 관한 생각이 가장 많았기도 했고요.” 길고 우울했던 20대의 터널을 음악과 더불어 빠져나온 이상은씨가 30대의 초입에서 그의 열 번째 정규앨범을 들고 돌아왔다. 기획사가 떠앉겼던 두장의 앨범을 빼더라도 한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여덟장의 음반을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끼워넣었다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기적이라고 표현해야 맞는 말이다. 해외가 아니라 한국에서만 활동했더라면 결코 수행할 수 없는 ‘불가능한 임무’이기에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하다.
작가적 역량으로 30대 초반에 이만한 위업(?)을 달성한 이씨는 그 업적의 무게 때문이라도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한데 도리어 그전보다 풀어지고 밝아졌으며 귀여워지기조차 했다. 음반발매나 공연 때 이따금 만나는 음반사 관계자들도 그가 많이 변했다고 한다. 전에는 특별히 할말이 없으면 늘 조용하던 이씨가 이제는 먼저 말을 붙이고 농담도 걸어온단다. 기자가 연습실에 찾아갔을 때 텔레비전 촬영을 하던 이씨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그에게는 그다지 편치 못한 것임에도 스탭의 요구에 더러 오버까지 하면서 늦어지는 촬영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있었다.
“많이 편해졌어요. 꼭 30대가 돼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공무도하가>(1995)앨범 때만 해도 ‘담다디’에서 벗어나려는 자의식의 과잉 때문에 음악에 대한 태도가 종교적이고 전투적이었죠. 음악과 나만 존재하는. 그런데 언제부턴가 음악과 나 사이에 타자, 듣는 이가 들어오더군요.”
“이제 평범해지고 싶다”
그러면서 그의 관심사는 나만의 스타일이나 해외진출에서 “평범해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씨에게 평범해진다는 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성이나 심성을 이해하는 것”, “내 노래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힘이 될 수 있을까 늘 생각하는 것”,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이상은씨는 자신의 변화를 평소에 자주 읽는 심리학자 융을 빌려 “유아기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번 앨범 역시 이상은씨의 이런 변화가 한껏 묻어나온다. <공무도하가> 이후 맑고 수수해진 그의 목소리는 에서 더욱 무채색으로 단순해졌으며 흥얼거리듯 읊조리듯 힘이 빠져 있다. 노래말에는 세월의 기류를 감지할 만한 나이가 된 한 예술가의 꾸밈없는 고백이 담겨 있다. ‘잊어버리는 데 몇년이 걸리고, 아무는 데 몇달이 걸리고/ 사람을 참 연약하구나. 기억이 아물거리네’(<오늘 하루>),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 지나간 뒤에야 의미를 아는 것/ 남아 있는 발자국이 지워질 때/ 곁에 있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삶>).
‘부정’의 20대를 지나보낸 뒤 이상은씨는 이제 상처의 기억도 자신의 것임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음악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은 비틀스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성장이란 그런 거구나 알게 됐죠. 지금은 누가 ‘담다디’ 때를 이야기해도 표정이 굳지 않아요. 그렇지, 그것도 난데, 그냥 그렇게 되더라구요.” 그도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씨는 요즘 가까운 사람들의 우울증 치료제로 담다디춤을 선보이곤 한다. 지난해 영국에 갔을 때 어려워하던 한국 후배들을 담다디춤 한방으로 녹여버릴 정도로 “아주 잘 써먹고 있다”고 말하며 웃는다. 이씨는 지난해부터 런던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 지내고 있다. 영국음악을 좋아해서 일단 가서 살자고 마음먹고 무작정 떠났는데 런던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첫 해외체류지였던 뉴욕에서 받은 것보다 훨씬 크고 또 훨씬 행복한 것이라고 한다. 이씨는 “천국 같다”고 표현한다. 매일 듣는 라디오의 얼터너티브록 채널이 있고, “진지하면서 우울한, 나랑 잘 맞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런던에서는 틈나는 대로 곡을 쓰는 것말고는 미술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음악적 영감을 던져주는 미술
뉴욕에서부터 시작한 미술공부는 그의 음악에서 떼놓을 수 없는 부분을 차지한다. “<공무도하가> 때는 <로스트 아트 오브 코리아>라는 한국의 민화집을 보면서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일월성신도의 느낌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민했었구요.” 그는 평소에도 노래말을 쓸 때 떠오르는 장면을 그려놓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언어를 취하는 방식을 택한다고 한다. “음악만으로 음악을 만들다보면 어느 정도 틀이 생겨요. 미술은 이런 틀을 없애고 상상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되죠.” 미술실력?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외롭고 웃긴 가게>(1997) 때 그룹전을 하기도 했지만 아직 당분간은 한국에서 점잔빼는 개인전을 할 계획은 없다고 한다.
언제까지 영국에 머물겠다는 똑 부러지는 계획은 없지만 여건이 되면 영국에서도 음악활동을 하고 싶다는 게 이상은씨의 소망. 그러나 영국이 그의 귀착지는 아니다. 마흔쯤 되면 어딘가 정착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또다른 곳으로 방랑을 하면서 다른 음악들, 다른 삶들을 배우고 흡수하고 싶다”고 한다. 하나 더. 이제 속깊은 남자친구를 만나고 싶지만 “참 찾기가 힘들다”니, 불가능해 보이던 10층의 음반탑을 쌓은 여성 싱어송 라이터에게도 음악만큼 좋은 연애는 기적보다 더 여려운 일인가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진흙탕 레슬링 경기에서 터져나오는 가학적인 환호성 같았던 인기를 훌훌 털어버리고 뉴욕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방랑하며 자신의 음악을 찾아가면서도 ‘외롭고 우울한’ 싸움은 계속됐다. 새로운 음반이 나오고 또 나와도 인사말처럼 ‘담다디’ 시절을 이야기하는 기자들 앞에서 부정의 도돌이표를 무수히 반복해야 했다. 일본에서 음악을 시작할 때 국경을 넘는 음악을 하겠다고 고집한 것에는 한국 가수를 보는 시선에 깔려 있는 은근한 무시에 대한 저항도 섞여 있었다. 한국가수 이상은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작가 이상은의 음악적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한 고민은 늘 그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밤에는 내가 디딘 땅이 우주처럼 보이는데 왜 낮이 되면 모든 것이 닫혀버리는 답답한 현실로 돌아오는 걸까, 이런 식의 답도 나오지 않는 질문이 왜 그럴까, 왜 그럴까 끝없이 이어지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죽음에 관한 생각이 가장 많았기도 했고요.” 길고 우울했던 20대의 터널을 음악과 더불어 빠져나온 이상은씨가 30대의 초입에서 그의 열 번째 정규앨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