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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기분 좋은 속전속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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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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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증’을 버리고 불꽃같이 진행된 <김점선 스타일2>

▣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나는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그렇듯이 ‘디테일’에 목숨 거는 편이다. 따라서 독자 입장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고민하면서 속을 썩이기도 한다(그러고 보니 내 삶이 상당히 피곤할 듯도 하다, 휴!). 어쨌든 나는 지금 21년차 편집자로서 두 가지 통념을 깨뜨리는 작업을 얼마 전 끝냈다는 고백을 하고 싶다.

출판계에서는 ‘집필기간과 제작기간이 길어야 역작’이라는 통념이 횡행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출판사는 홍보용 띠지에 “집필기간 5년, 제작기간 2년” 운운하는 낯간지러운 표현을 넣기도 한다. 모두 진실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책은 오래 만들고 묵은 것이 더 나은 발효식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이란 원래 천의무봉해야 하는 물건으로, 편집자가 뭐라고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전혀 없는 법이다.


이런 홍보용 문구를 읽은 독자의 마음이 조금은 흔들리는 듯하다.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는 이해 못할 것이 아닌데, 사실 이제까지 출판사의 독자 대접이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 출판사에서 출간한 <김점선 스타일2>. 이 책은 엉뚱하다면 엉뚱하고,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천진하기 이를 데 없는 화가 김점선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필자만 47명. 기획해서 만드는 기간까지는 미안하게도 고작 3주! 필자들에게 청탁해 원고를 받기까지 길어야 1주일 정도.

화가 김점선은 한문학자 정민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 하나는 있어도 되지만, 둘은 곤란한 사람(不可無二, 不可有二)”이다. 그런 화가에게 세속적인 의미의 환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니 기념문집이란 게 또 얼마나 화가의 삶과 유리된 행위란 말인가. 우리는 고민했다. 그리고 우리는 화가 김점선의 직설적인 어법과 성격에 어울리게 그녀의 스타일대로 47명의 지인에게 각각 다른 ‘말’ 그림을 화두로 던진 뒤, 그에 대한 응답의 글을 같이 엮어내기로 결정했다. 촌철살인, 속전속결, 마치 영화감독 강우석이나 김기덕의 촬영 스타일처럼 편집 기간을 초스피드로 가져가기로 했던 것이다. 청탁 내용도 간단했다. “뭘 쓸까 오래 번민하지 마시고, 그림을 딱 본 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불꽃처럼 써주시라”는 것이었다. 말이 쉽지, 47명이나 되는 필자의 원고를 일주일 안에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우리도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월드컵 4강 같은 기적은 이뤄졌다. 어떤 필자는 청탁한 지 불과 몇 분 뒤에 원고를 보내기까지 했으니까. 말의 의미 그대로 불꽃 같은 청탁에 불꽃 같은 응답으로 임파서블한 미션을 가능케 해준 김점선의 필자들이여, 만세!

이제 다음으로는 편집 작업이었다. 온갖 편집증, 디테일 집착증 환자인 우리 편집자도 이런 필자의 노력에 감염이라도 된 듯 일사천리로 작업을 진행해나갔다. 이렇게 쓰고 보니 책을 빨리, 잘 만들었다는 자랑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독자들이여 이 말만은 믿어주시라. 홀린 듯이 만들었고, 9500원이라는 이 책의 가격에는 다 포함되지 않은 그 무엇이 이 속에는 반드시 있다는 것을. 때론 빨리 데쳐내야 영양가 만점인 요리가 완성된다는 것을.

이 책은 앞서 적은 것처럼 한 사람의 회갑을 기념하는 문집이다. 그러나 이렇게 적으면 너무 많은 것이 이 속에서 ‘결락’된다. 이 책은 어떤 화가의 불가해한 스타일 제안이고, 삶에 대한 어떤 근원적 질문을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던지고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짐으로써, 많은 쓰레기와 함께 공존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잃어버렸다는 아픈 이야기가 이 속에는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이 책을 최소 5천 부는 팔아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이런!).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우리는 ‘팔 수 있다’는 그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이제 이런 ‘기념문집’ 유형의 책은 안 팔린다는 두 번째 통념을 독자는 깨주시길 바란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스스로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통념을 깨보니 삶이 가볍고 자유로워졌다. 이 책을 만들면서 나는 누구보다 먼저 큰 은혜를 입은 것이다. 당신도 조금씩 내가 느낀 행복과 자유를 공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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