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고 겸손했던 프랑스 이주민의 아들과 영국 노동계급의 대표선수…수줍지만 할 말은 했고, 명문 구단 유혹에도 고향팀 가는 강단 있었지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선배 머리가 점점 지단 닮아가네.”
‘컨추리 꽃미남’의 질투가 분명했다. 일찍이 ‘시사넌센스’를 통해 컨추리 꽃미남으로 명명한 류이근 기자가 화창한 봄날, 모처럼의 회식에서 괜스레 잠자는 선배의 머리털을 건드렸다. 뭔가 우아하게 복수를 해야 하는데 약간 생뚱맞은 말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알았니? 나랑 지단이랑 같은 날 태어났단다.”
이주자들의 저항에 가슴아파한 지단 정말이다. ‘본인’은 지단과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다. 지단의 개인정보를 마음대로 공개하면, 그날은 1972년 6월23일. 물론 프랑스와 한국의 시차를 생각하면, 반드시 같은 날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우나 어쨌든 숫자로 표시되는 날짜는 똑같다. ‘네이버’ 지식인이 거짓말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렇다. 아직도 ‘창창한’ 지단이 4월26일 은퇴를 선언했다. “독일 월드컵이 선수로서 마지막 무대”란다. 축구신사는 은퇴 이유도 신사스럽게 “레알 마드리드의 리빌딩을 위해서”라고 밝혔다. 자신의 연봉으로 젊은 선수들을 수혈해서 지구 방위대의 면모를 되찾으라는 말씀. “청년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던 루쉰 선생의 말씀을 실천하는 결단이다. 박수칠 때 떠나는 지단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아무리 머리가 빠져도.
지네딘 지단은 알제리 이주노동자의 아들로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누군가 마르세유를 프랑스의 울산이라고 했던가. 이주노동자 밀집지구에서 성장한 지단은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성공한 뒤에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올해 프랑스에서 이주자들의 집단 저항이 벌어졌을 때, 지단은 “그들의 행동(방화와 파괴)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충분히 이해한다”며 가슴 아파했다. 2000년 프랑스 대선에서 극우파 르펜이 본선에 오르자 “나는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지만 요즘 일어나는 일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르펜에게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고 발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지단은 수줍고 겸손한 사람으로 유명해서 그의 한마디는 더욱 울림이 컸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지단이 우연히 안드레 아가시와 같은 호텔에 머물게 됐는데, 아가시를 틈틈이 지켜보았지만 수줍어서 차마 말을 걸지 못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겸손한 지단의 성격은 그라운드의 플레이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선수였지만, 그라운드의 독재가가 아니라 중원의 지휘자였다. 유벤투스 시절 스승이었던 리피 감독은 지단에 대해 “지난 20년간 최고의 선수였다”고 최고의 상찬을 했지만, 리피의 더욱 아름다운 칭찬은 “그는 언제나 프리마돈나가 아니라 팀의 일원이었다”는 말이었다. 지단은 훌륭한 선수일 뿐 아니라 좋은 남편이다. 지단이 이탈리아의 유벤투스에서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로 옮긴 이유 중 하나는 향수병을 앓는 스페인 출신 아내를 위해서였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신사의 면모를 잃지 않는 지단을 프랑스인들은 ‘지주’(Zizou)라는 애칭으로 부르면서 사랑했다. 어디 프랑스인뿐이랴. 1998년, 2002년 그리고 2006년, 세계의 축구팬은 4년마다 월드컵을 통해 지단의 이마가 점점 넓어지고, 이마의 주름이 차츰 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프랑스에 수줍은 지단이 있다면, 영국에는 성실한 시어러가 있다. 지난 4월에는 앨런 시어러가 은퇴를 선언했다. 1972년생 지단이 프랑스 이주민의 상징이라면, 70년생 시어러는 영국 노동계급의 대표선수처럼 느껴진다. 시어러는 94~95 시즌부터 3시즌 연속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유로2000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을 은퇴하기 전까지, 90년대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삼십 줄에 접어든 뒤에도 꾸준히 10골 이상, 때때로 20골 가까이를 기록하면서 녹슬지 않는 기량을 과시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캡틴’이었고, 뉴캐슬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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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러는 뉴캐슬에서 태어났고, 가족은 뉴캐슬 서포터였다. 시어러는 뉴캐슬의 유니폼을 갈망했지만, 유스팀 입단 테스트에서 떨어졌다. 소년 시어러는 좌절하지 않고 사우스햄프턴에서 축구의 꿈을 키웠고, 마침내 17살에 잉글랜드리그 사상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세웠다. 소년은 명문구단에 영입되는 안전한 길을 마다하고, 당시 1부리그에 갓 올라온 블랙번 로버스에 입단하는 모험을 선택했다. 시어러의 블랙번은 94~95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시어러는 같은 해 35골을 터뜨리면서 잉글랜드를 넘어 세계 정상의 스트라이커로 떠올랐다. 역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유럽 각국의 명문구단에서 영입 제의가 쏟아졌지만, 청년 시어러의 선택은 고향팀 뉴캐슬 유나이티드였다.
‘뉴캐슬 사나이’의 변함없는 클래스
뉴캐슬 사나이는 우승의 영예도 거액의 연봉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06년 2월 마침내 뉴캐슬 클럽 사상 최고 득점 기록을 세웠다. 통산 201골을 고향팀에 바쳤다. 뉴캐슬 사나이는 최고 기록을 바꾸고 나서야 비로소 은퇴 의사를 밝혔다. 시어러는 지난 3월 인터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도 입단하고 싶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고향팀 뉴캐슬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시어러는 언제나 침착한 선수, 슈팅을 남발하지 않는 선수, 팀의 대들보가 되는 선수로 유명하다. 변치 않는 클래스를 유지하는 그의 꾸준한 플레이를 보면, 성실한 노동계급의 묵묵한 일상이 주는 감동이 밀려든다.
지단은 은퇴 이유로 “선수생활을 이어가기가 힘들어지는 나이”라고, “더 이상 축구를 즐기기 어렵다”고 말했다. 나도 기자생활을 이어가기가 갈수록 힘들어지고, 더 이상(아니 한 번도) 기사쓰기를 즐기기도 어렵다. 더구나 올해는 직장생활 10년째를 맞았다. 정말 이제는 은퇴하고 싶다. “나도 은퇴할래!” 나의 투덜거림을 듣고 있던 구둘래 기자가 일갈한다. “지단만큼 벌었으면!” 팬은 스타와 함께 늙어가지만, 스타처럼 은퇴할 자유는 없다. 쳇!
이주자들의 저항에 가슴아파한 지단 정말이다. ‘본인’은 지단과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다. 지단의 개인정보를 마음대로 공개하면, 그날은 1972년 6월23일. 물론 프랑스와 한국의 시차를 생각하면, 반드시 같은 날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우나 어쨌든 숫자로 표시되는 날짜는 똑같다. ‘네이버’ 지식인이 거짓말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렇다. 아직도 ‘창창한’ 지단이 4월26일 은퇴를 선언했다. “독일 월드컵이 선수로서 마지막 무대”란다. 축구신사는 은퇴 이유도 신사스럽게 “레알 마드리드의 리빌딩을 위해서”라고 밝혔다. 자신의 연봉으로 젊은 선수들을 수혈해서 지구 방위대의 면모를 되찾으라는 말씀. “청년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던 루쉰 선생의 말씀을 실천하는 결단이다. 박수칠 때 떠나는 지단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아무리 머리가 빠져도.

중원의 지혜자 지단(왼쪽)사진/AP/ JACQUES BRIN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