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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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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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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등록도 하기 전에 제안서 한 장만으로 시작된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

▣ 이재민 휴머니스트 편집주간

휴머니스트에는 방명록이 늘 비치돼 있다. 저자나 역자 선생님들이 친필로 써놓은 방명록에는 저마다의 개성이 실린 새겨둘 만한 격려의 글들로 가득하다.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 작업을 하면서 가끔 떠올린 글이 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시기 바랍니다!” 한비야 선생님이 써준 글이다.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의 기획과 제작 과정은 정말 ‘지도 밖으로의 강행군’이었다. 수십 년 동안 우리가 경험했고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교과서라는 지도, 우리는 남들이 그려놓은 그 지도 밖으로 나가 새로운 지도를 그리고 싶었다.

국정 교과서? 대안 교과서!


어느 것 하나 무모하지 않은 게 없었다. 국정과 검인정이 아닌 대안이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붙었지만 이 역시 교과서였다. 개발 기간과 비용, 인력 면에서 중견 출판사도 감당하기 힘든 프로젝트였다. 우리는 노하우, 자본, 마케팅 모든 것이 백지 상태였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새롭게 그린 지도 한 장뿐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그렇지만 시작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의 확신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돌이켜보면 도전은 무모할 정도의 순진한 열정에서 시작한 사람들에게도 힘을 발휘하는 포용력을 지닌 것 같다.

정확히 5년 전인 2001년 4월25일 전국역사교사모임과 휴머니스트는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의 출판계약을 체결했다. 그때 휴머니스트는 사무실도 없었고 출판사 등록도 하기 전이었다. 당시 전국역사교사모임은 몇몇 출판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이름을 대면 다들 알 만한 출판사들이었다. 출간한 책 한 종도 없는 휴머니스트가 내세울 만한 것은 무엇일까? 문제의식이었다. “대안 교과서가 대안의 역사를 살아가기 위한 휴머니스트의 제안서”였다. 책가방이나 교실 속에만 있는 교과서를 시민사회로 불러내어 청소년과 부모가 읽고 소통하는 교과서로,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10년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교과서를 만들자는 요지를 담으면서 휴머니스트가 대안 교과서의 발간에 얼마나 남다른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충분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전달했다. 결국 제안서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날, 제안서를 아름답게 읽었다는 교사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들에 대한 강한 믿음을 느꼈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 2002년 3월25일, 영등포 청소년하자센터에서 출판보고회가 열렸다. 문화방송과 일본 등에서 전 과정을 취재했다. 대표 집필자 중 한 분인 양정현 선생님(당시 구일고 교사, 현 부산대 역사교육과 교수)은 휴머니스트와의 만남이 한마디로 행복한 만남이었다고 말했다. 책임 집필자이자 전국역사교사모임의 회장인 김육훈 선생님(상계고 교사)은 모든 공을 휴머니스트에 돌렸다. 집필자들뿐만 아니라 개발을 담당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소개됐고 그때마다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정말 나도 행복했다.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들을 모두가 담고 있었다.

지은이와 편집자의 관계는 무엇일까

저자와 편집자 간의 관계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책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색하는 동반자 관계라고 생각한다. 저자와 편집자, 그 행복한 만남은 이렇게 시작했다.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는 새로운 교과서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전국역사교사모임과 휴머니스트는 “한국인의 눈으로 세계사를 읽는다”를 모토로 2005년 10월, 3년6개월의 작업 끝에 <살아 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출간했고, 2007년 3월 출간을 목표로 <살아 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그리고 있다.

이 길은 전국역사교사모임과 휴머니스트가 공감했듯,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도 오랫동안 정답에 길들여졌다. 또 다른 행군 역시 순진함, 무모함이 필요할 정도로 새롭고 엄청난 도전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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