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이성은 A4용지 위에 존재한다

608
등록 : 2006-05-04 00:00 수정 :

크게 작게

▣ 반이정 미술평론가 http://dogstylist.com

가방 안에서 약간 넘치는 세로 사이즈 때문에 반을 접어 보관합니다. 황금분할에 다소 못 미치는 1.4142:1은 완벽한 비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A4용지는 공문서 및 여하한 서류 일반의 국제 표준입니다. 그것은 결재서류, 리포트, 복사지, 이면지, 메모지까지 포괄합니다.

디지털 혁명의 상징적 문구 ‘종이는 사라질 것이다’의 도발은 사무실 여기저기 쌓인 A4 뭉치를 통해 완벽한 허구로 입증되었습니다. 모니터 속 바이트의 편집된 정보도 백색 네모격자의 승인 속에 가치가 정해집니다. 인간의 이성은 오로지 A4 위에서 존재합니다. 해서 우리의 추상적 사고는 정확히 210×297mm의 구체적 크기 속에 갇혀 있습니다. 가용한 양면 중 한 면은 쓰고 반대 면은 버리는 게 통례입니다. 물자절약 차원의 이면지 권장에도 이행률이 저조한 까닭은 뒷면이 훼손된 반쪽짜리 순백 위에 자신의 생각을 완성하는 것이 순결성에 흠집을 낸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4는 타불라 라사(텅 빈 서판)의 철학입니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

반이정의 사물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