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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독자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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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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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객의 긴 줄을 보며 그들의 ‘에너지’를 생각하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이 ‘실업’이라고 어느 시인은 불우하게 말했다. 그러면 애타게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은 취업인가? 나도 이 두 상황을 겪어보았지만 개인적으로 그리 불우하거나 애타지는 않았다. 어느새 편집자가 되어 여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놀랍다. 무얼 기다려 다가온 지금일까, 결국 돌아보기 위해서겠지 싶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실업)가 있다’고 말한 또 다른 시인의 머리 긁적이는 엉너리 또한 그럴싸한 삶의 매뉴얼처럼 들리기도 한다.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온 ‘Editor’s cut’을 이런 말장난으로 시작하는 까닭은, 하는 일과 관련지어 ‘자유롭고 재미나게’ 쓰라는 글 숙제는 자꾸 돌아보게끔 만드는데, 돌아보자 실업 비유처럼 난감한 처지를 발견하게 돼서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어수선한 이야기 하나. 얼마 전 CGV용산에 3D 아이맥스 영화를 보러 갔다가 엄청난 발견을 했다. 마치 봉준호 감독이 고등학교 때 한강에서 괴물을 본 것처럼. 칸칸마다 두 사람씩 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머리 위를 가로지른 대형 광고를 고개가 꺾어져라 쳐다보면서 올라가서 되돌아서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스크린 입구를 향해 손에 똑같은 팝콘과 음료수를 들고 몰려 들어가고 있었다. 새삼 어떤 입구로 몰려 들어가는 사람 떼거리를 보고 놀라다니. 언젠가 당신도 안전모를 쓰고 전구로 불 밝힌 천연동굴을 구경하고 나설 때 동굴의 주름진 안이 세계의 거죽이고, 동굴 밖이 세계의 내부가 아닐까라는, 입구가 곧 출구가 되는 우스운 상상을 품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처럼 밝은 곳에서 어두운 ‘출구’로 쏟아져 들어가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나는 갑자기 돌아보게 된 것이다.

조금이라도 책을 읽지 않고서는 삶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지? 비록 ‘지금 사두고 읽지 않더라도 책은 어느 날 반드시 읽게 되리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예언을 뒤따라 사서 쟁여놓은 책더미에 먼지가 이는 손부끄러운 생활 속에서도 있어야 할 자리에 책이 ‘있음’에 안심했다. 그리고 읽지 않더라도 책이라는 물질이 반드시 갖춰져야 할 삶의 인테리어라는 동의를 구하고 납득하는 습관이 직업으로까지 이어졌다. 과장되게 말해서 이러한 ‘책의 경배’가 지난 세기까지 그 많은 책들을 만들어내고, 책을 사들인 이들의 욕망의 습벽일 것이다. 즉, 어떤 이들에게 책은 ‘두 번째 해’였다.


그날 나는 꿈에서 깬 것마냥 ‘책을 읽지 않아도 채울 수 있는 삶’을 제공한다는 엔터테인먼트 터미널에 선 것 같았다. 그 뜬금없는 발견은 개운하고 선듯했다. 영화라는 시간을 향해 한데 모인 관객들이 가진 에너지가 지난 연대의 ‘독자’들이 가졌던 욕망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즉, 어떤 이들에게는 영화가 ‘두 번째 달’이면 어떤가.

몇 년 사이 ‘관객’을 향한 책의 형식이 눈에 띄게 변신하고 있다. 편집 쪽으로는 얇은 쪽수에 활자는 부쩍 커지고, 풍부한 도판들이 삽입된 과감한 구성과 디자인 등이 돋보인다. 기획 쪽으로는 경제경영 서적, 청소년 논술·과학 참고서, 장르 문학, 고급한 장정의 고가본, 영상 콘텐츠 기획물, 세분화된 실용서적 등이 각광받고 있다. 이처럼 쏟아져나오는 가뿐하고 새로운 종들의 출간을 두고 어떤 이들은 독자라는 상상된 인격의 실업을 염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읽어볼 만한 책과 독자가 면접 볼 기회는 여전히 많으니 걱정을 덜자.

며칠 전에도 아름다운 책을 만났다.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지닌 경이로운 동물들 97종을 그리고 해설한 <경이로운 생명>(팀 플래너리 글·피터 샤우텐 그림, 이한음 옮김, 지호, 2006)이라는 책을 펼치면 콩자반만 한 실제 크기의 아기맹꽁이가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듯이 앉아 있다. 뒤이어 기묘한 풍조들의 길쭉한 꼬리가 살랑인다. 이 찬찬히 관찰하는 근사한 기쁨은 책이 아니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체험이다. 지금 읽지 않더라도 곁에 사두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다. 내가 극장에서 갑작스레 눈치챈 것처럼, 책읽기의 즐거움을 불현듯 느낀 이들이 만지고 싶어할 책을. 그건 비싸거나 화려한 책이 아니다. 경이로운 생각과 문장과 솜씨와 쓸모가 담긴 책에는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는 독자가 있지 않을까. 없으면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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