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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모두가 관계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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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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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열 안동 성소병원 응급의학과 과장

의학의 각 분과는 저마다의 특성이 뚜렷한데, 응급의학과의 특성 중 하나가 항상 죽음을 가까이하는 진료과목이라는 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환자만이 아니라 병원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사망한 뒤에 오는 환자도 응급실을 거쳐가므로 이미 사망한 환자를 다른 과보다 더 많이 본다.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도 이미 죽어 검안을 한 환자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미 사망한 환자가 119 차량에 의해 응급실에 도착했다. 목 앞쪽에 가로로 깊은 삭흔(파인 흔적)이 있었고 이 삭흔은 귀 뒤로 V자형으로 올라가 있었다. 목매달아 자살한 환자의 전형적인 삭흔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줄 같은 도구로 목을 졸라 죽인 타살이라면 삭흔은 V자형이 아니라 목 뒤까지 평형선을 남기므로 일단은 자살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법의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가해자라면 자살처럼 보이게 하는 타살도 가능하므로 바지와 하의를 벗겨보았다. 속옷에 사정의 흔적이 보였다. 자살의 거의 확실한 증거다. 목이 졸려 죽은 환자가 남자라면 자살인지 타살인지 구별하는 강력한 증거 중 하나가 사정의 흔적이다. 여기까지라면 젊은 남자이기에 조금 더 기억에 남을지 모르지만 흔한 자살의 하나로 기억에 남을 이유가 별로 없다. 이 환자가 기억에 생생한 이유는 경찰이 보여준 유서 때문이다. 이미 10년이 지났지만 그 유서의 내용은 아직도 생생하다. 유서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거친 글씨와 짧은 단문으로 보아 중졸이나 고졸 정도의 학력으로 보였다. “다시 태어난다면 병신으로 태어나지 않겠어요. 어머니 죄송해요. ○○야 사랑했다.” 유서를 보는 순간 냉정할 수밖에 없는 의사인 내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이미 죽어서 온 환자는 소아마비 환자였다. 이 환자는 그 뒤 두고두고 의사로서 내 삶에 화두가 되었다. 심한 장애를 가지고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약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도 물론 들었고, 자살 환자의 정신 상태에 관심을 가지게도 했다. 무엇이 이 환자를 자살하게 했을까? 자살의 원인을 떠올려보았다. 도피로서의 자살, 복수로서의 자살, 재생으로서의 자살, 이타적인 자살 등 많은 자살 원인 중에서 이 환자를 죽게 한 원인은 무엇인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하반신 마비 환자가 가장 괴로워하는 문제, 죽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배설의 처리를 남의 손을 빌려서 할 수밖에 없을 때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도 의사가 된 지 10년이나 지나서야 알게 되었으니, 내 자신의 무지를 부끄럽게 만든 환자였다. 다시 말해 장애 환자의 가장 효과적인 재활은 직업이다.

무엇이 이 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형식은 자살이지만 잠깐이나마 유서 내용을 되새기면 이 죽음의 근본 원인은 무지와 차별 그리고 빈부격차, 사회 안전망의 부족, 우리의 무관심이 어우러진 사회적 타살이다. 한국인으로서 혹은 인간으로서 이 환자들의 죽음과 관계없다고 말할 수 있다면 빌라도도 예수의 죽음과 관계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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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