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지하철에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 둘이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사연인즉슨, ‘속상녀’의 남자친구가 약속을 툭하면 안 지키고 전화도 자기 편할 때만 한다는 것이다. 주말에 만나기로 해서 내내 비워놓고 기다리면 일요일 저녁쯤 전화를 해서 “어제 새벽까지 일하다(혹은 놀다) 늦잠을 잤다. 너무 피곤해 오늘은 쉬어야겠다”는 뻔한 레퍼토리를 펼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충고녀’는 “남자들은 다 그러니 참으라”고 했다. 속상녀가 “전화는 왜 안 받았냐”고 묻자, 남친은 “배터리가 나갔다”고 했단다.
그래서 “주말 내내 기다렸는데 너무한 것 아니냐”고 따졌더니 남친이 “넌 친구도 없냐? 왜 나만 기다리냐?”고 적반하장 화를 내더란다. 속상녀는 크게 속상했단다(그러게 말이다. 넌 정말 친구도 없니?) 그러자 충고녀의 충고. “기다렸다면 안 되지. 남자들이 그런 부담 얼마나 싫어하는데.” 속상녀가 물었다. “왜 만나는 남자마다 이럴까? 내 문제가 뭘까?”(오홋, 훌륭한 질문) 하지만 ‘후딱 깨는’ 충고녀의 답변. “네 문제는 너무 순진한 거”란다. 그러자 속상녀의 표정이 ‘순진하게도’ 밝아진다. 내가 보기에 속상녀의 가장 큰 문제는 충고녀에게 친구랍시고 충고를 구하는 거 같은데(순진하단 소리 듣는 게 그 나이 되도록 그렇게 좋니? 이 미련곰탱아). “얘, 너 쟤 얘기 듣지 마”라는 말이 올라왔으나 꾹 참았다.
좌석버스 뒤에서 소곤되는 ‘과년한 중년 언니들’도 간혹 남 얘기 하듯(실제로는 자기 얘기면서) 남편으로 추정되는 자와의 관계(섹스) 트러블을 꺼낸다. 이어지는 충고는 대부분 “남자는 다 그러니 참아야 한다”는 것. 이어 ‘더 심란한 사례’를 위로랍시고 읊어준다. 왜, 언제까지, 어떻게 참냐고요. 그런다고 침실 평화가 지켜지냐고요. 벌떡 일어나 “언니, 저 언니랑 놀지 마!” 하고 싶어진다.
내 주변에도 주변머리 없는 애들 적지 않다. 과거 같으면 손녀 볼 나이인데 남자 문제로 징징대거나 자랑할 게 없다면 전화 한 통 없다. ‘꺾어진 나이’가 되면 남자 문제를 건강 염려와 청약 부금이 차지하지만, 일찌감치 정신 차린 얘들만 그럴 뿐. ㅂ의 일희일비도 어떤 점에선 문제적이다. 시련을 딛고 연애 전선에 복귀한 ㅂ은 최근 소개팅한 남자에게서 전화가 오느냐 안 오느냐에 따라 주말 기상도가 달라졌다. 어느 날 밤에도 그의 전화를 기다리다 “대체 나는 뭐가 문제지?”라고 내게 물어왔다. “투망 던질 타이밍에 찌낚시 하고 자빠진 거”라고 사정없이 얘기했다. ㅂ이 새벽 2시에 “새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문자를 날려왔을 때 “예수님과 유부남만 아니면 돼. 근데 제발 새벽에는 빠지지 마라”고 성실·근면하게 답했는데, 부적절했다. 사흘 뒤 새벽 “이 시키도 나한ㅌ 반한 겡 아니엇다”는 취한 문자가 또 날아왔기 때문이다. ㅂ은 다음날 너무 굶어서 잠깐 돌았다며, 앞으론 손가락 묶어놓고 술 마시겠다며 싹싹 빌었지만, 남자 문제를 빌미로 친구를 소외시키거나 대체물 취급하는 건 아닌지 깊이 반성할지어다. 그나마 ㅂ의 다른 친구들은 “참고 기다리라”는 식의 ‘부적절한 코치’는 하지 않는 것 같아 천만다행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내 주변에도 주변머리 없는 애들 적지 않다. 과거 같으면 손녀 볼 나이인데 남자 문제로 징징대거나 자랑할 게 없다면 전화 한 통 없다. ‘꺾어진 나이’가 되면 남자 문제를 건강 염려와 청약 부금이 차지하지만, 일찌감치 정신 차린 얘들만 그럴 뿐. ㅂ의 일희일비도 어떤 점에선 문제적이다. 시련을 딛고 연애 전선에 복귀한 ㅂ은 최근 소개팅한 남자에게서 전화가 오느냐 안 오느냐에 따라 주말 기상도가 달라졌다. 어느 날 밤에도 그의 전화를 기다리다 “대체 나는 뭐가 문제지?”라고 내게 물어왔다. “투망 던질 타이밍에 찌낚시 하고 자빠진 거”라고 사정없이 얘기했다. ㅂ이 새벽 2시에 “새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문자를 날려왔을 때 “예수님과 유부남만 아니면 돼. 근데 제발 새벽에는 빠지지 마라”고 성실·근면하게 답했는데, 부적절했다. 사흘 뒤 새벽 “이 시키도 나한ㅌ 반한 겡 아니엇다”는 취한 문자가 또 날아왔기 때문이다. ㅂ은 다음날 너무 굶어서 잠깐 돌았다며, 앞으론 손가락 묶어놓고 술 마시겠다며 싹싹 빌었지만, 남자 문제를 빌미로 친구를 소외시키거나 대체물 취급하는 건 아닌지 깊이 반성할지어다. 그나마 ㅂ의 다른 친구들은 “참고 기다리라”는 식의 ‘부적절한 코치’는 하지 않는 것 같아 천만다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