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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왜 다시 대중독재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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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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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토론회를 계기로 들여다본 대중독재론에 대한 오해와 진정한 의미… 독재 정당화가 아니라 근대 민주주의의 한계를 급진적으로 비판한 것

▣ 장문석 한양대 연구교수

최근에 대중독재론은 근대 독재의 근원적 의미를 다시금 캐물음으로써 침체된 우리 인문사회과학계에 자못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사실, 대중독재만큼 우리 학계에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킨 지적 화두도 없을 것이다. 특히 대중독재론은 박정희 체제와 그의 시대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학문적 논쟁을 넘어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독재는 대중의 광범위한 동의 기반을 향유했다.” 대중독재론은 박정희 체제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인문사회과학의 특정한 논제가 이렇게 드높은 관심 대상이 된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며, 논쟁 과정에서 어떤 합의가 도출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대중독재론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덥석 삼킬 수도 없고 무턱대고 뱉을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대중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라

그렇다면 대중독재론은 무엇을 주장했기에 그런 열혈 논쟁을 불러일으켰는가? “요약하는 자들은 지식을 망쳐놓는 놈들”이라는 다빈치의 말이 떠올라 적이 염려되지만, 대중독재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근대 독재들은 통상 억압과 폭력의 악마적 이미지들로 채색돼왔으나 실제로 그것은 위로부터의 강제적 동원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동원 체제를 구축했으며, 나아가 대중의 광범위한 동의 기반을 향유했다. 이는 곧 대중이 독재에 연루되고 심지어 그것과 공모했음을 암시하며, 따라서 소수의 사악한 가해자와 다수의 선량한 피해자라는 도식은 순진함을 넘어 허구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도식을 고집하는 한 독재가 정치적 파산 선고를 받았음에도 독재자에 대한 향수가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모순적인 현실을 설명할 길이 없다. 독재를 진실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순히 비난하기에 앞서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통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이상이 대중독재론의 대략적인 요지이자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아닌가 한다.

과연 대중독재론은 숱한 비판을 낳았다. ‘독재’가 본래 1인 지배를 뜻할진대 ‘대중독재’는 일종의 형용모순으로서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 아닌가? 독재에 대한 대중의 순응과 소극적 지지가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동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 설령 동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특별한 일인가? 즉, ‘순수한’ 민주주의에서도 군대와 경찰이 상징하는 강제력이 엄존하듯이, 모든 지배에는 강제와 동의가 공존하는 것이 아닌가? 나아가 대중독재론은 독재의 경험에 대한 내면적 반성을 촉구하면서 실은 독재를 은밀하게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가? 요컨대 이상의 다양한 비판들의 양 모서리에는 대중독재론이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적인 엉뚱함의 발로이거나, 아니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적인 경솔함의 소치라는 냉소적인 판단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엉뚱함이나 경솔함의 다른 이름은 패기와 진지함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중독재론은 독재에 의해 핍박받고 그에 저항한 대중이 실은 독재자에 열광한 바로 그 대중임을 알아야 한다고 패기 있게 지적하고 있다. 한마디로 대중을 정치적으로 순수하고 올바른 존재로 보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대중독재론은 독재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강조할뿐더러 대중의 저항과 동의 사이에 펼쳐진 넓은 회색 지대, 그러니까 지지, 수용, 적응, 체념, 소극적 반대 등 독재에 대한 대중의 착잡하고 미묘한 태도들을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대중독재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좌우명은 미시사를 위한 구호와 유사해 보인다. “사물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을 때, 왜 단순하게 만드는가?”

근대 권력의 뿌리를 드러내는 것

대중독재론은 그와 같은 패기와 진지함을 바탕으로 독재가 대중을 단순히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적이면서 내면화된 복종을 끌어오기 위한 길들이기 전략을 실행했음을 강조한다. 사실, 근대의 모든 지배는 피지배자의 동의나 지배 이데올로기의 내면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람시나 푸코나 알튀세르 같은 일급의 이론가들이 한 일도 결국 나름의 방식대로 그런 근대 권력의 속성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근대 권력은 일종의 원형 감옥 같아서 수감자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처벌하지 않아도 사방에서 감시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만으로 수감자들의 복종을 유도한다. 요컨대 근대 권력이란 매질하는 권력이 아니라 ‘나는 자유롭다’는 환상을 깨지 않으면서(아니, 부추기면서) 감시하는 권력인 것이다. 이 원형 감옥 이론에 국민 주권론이 덧붙여지면, ‘우리가 권력의 주인’이라는 (가상적인) 원리 아래 대중을 설득하고 동원하는 효과적인 근대 권력 장치가 완성된다. 이렇게 보면, 대중독재론의 최대 학문적 성과는 독재를 비근대적이거나 반근대적인 정치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근대 권력의 지형도 위에서, 그러니까 한마디로 근대성의 매트릭스 속에서 파악한 것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 독재를 분석할 때 ‘권력 일반’의 수준과 ‘권력 형태’의 수준을 구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무슨 말이냐 하면, 권력 일반의 수준에서 분석하면 독재건 민주주의건 대중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근대 권력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만, 권력 형태의 수준에서 분석하면 권력이 표현되고 행사되는 방식이 독재적이냐 민주적이냐 하는 문제가 상당히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한번 물어보자. 독재와 민주주의 체제 중 하나에서만 살라면 어디를 택하겠는가? 아무 데인들 어떠랴 하겠는가? 여하튼 대중독재론이 바탕을 둔 근대 권력 이론의 치명적인 유혹에 넘어가 독재와 민주주의의 거리를 한껏 좁히다 보면, ‘언제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식의 허무주의, 혹은 ‘네오’ 같은 희대의 영웅 없이는 ‘매트릭스’에서 영영 탈출할 수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히틀러의 나치는 폭력적이기만 했는가. 독재 문제에 있어 소수의 사악한 가해자와 다수의 선량한 피해자라는 도식은 순진함을 넘어 허구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허무주의와 패배주의를 경계하면서 대중독재의 논점들을 역사 해석과 정치 비평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취급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관대한 평가일지도 모르고 잘못된 판단일지도 모르나, 대중독재론은 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론이 아니라 근대(즉,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급진적’이란 사물을 그 뿌리부터 ‘근본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대중독재론은 독재와 민주주의가 맞닿아 있는 근대 권력의 뿌리를 드러냄으로써 일단 ‘급진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데는 성공했다. 아직까지 그런 문제제기가 갖는 비판적 함의가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그 함의를 잘 살려나가야 한다고 본다. 확실히 대중독재론을 둘러싼 지금까지의 논쟁을 통해 독재가 단순히 억압과 폭력에만 의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널리 인정됨으로써 논쟁 양편의 거리가 좁혀진 것은 큰 성과다. 그리고 이런 성과로부터 ‘대중의 동의냐 저항이냐’ 혹은 ‘독재의 정당화냐 아니냐’는 식의 불필요한 오해와 변호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논의의 실천적 함의를 차분히 따져보는 터전이 마련됐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시대의 경험을 돌아본다

이제 대중독재론은 갈림길에 서 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내실 있는 학문적 논의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렇게 대중독재의 개념을 학계의 논의 구도 속에 정확히 위치지어야만 대중독재론의 실천적 함의를 제대로 추출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캐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묻힌 위치를 가늠해야 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4월14일에 열린 학술토론회 ‘근대의 경계에서 독재를 읽다’의 기획은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국내외에 축적된 학문적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하여 한편으로 서양 근대의 국가 형성이라는 긴 역사적 맥락에서 독재의 기원을 밝히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의 근대 경험, 특히 박정희 시대의 경험을 돌아본다. 일상사·구술사·미시사의 새로운 역사 방법들이 ‘대중’의 욕망과 ‘독재’의 요구 사이의 일치와 불일치, 그 미끄러짐을 포착함으로써 ‘대중독재’에 대한 동의와 저항의 섬세한 주름들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리라 본다. 그런 드러냄을 통해 역사적으로 타당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해석의 이상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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