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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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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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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다음호부터 시사주간지 사상 최초의 옴니버스식 장편만화 매주 연재…“가난한 경상도 2남4녀 가족 통해 궁상스럽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 그려낼 것”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만화가 최규석이 다음호(606호)부터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두 쪽씩 만화연재를 시작한다. 만화가 실리는 것은 2004년 9월 조남준씨가 ‘시사SF’를 마지막으로 내보낸 뒤 1년 반 만이다. 시간은 과히 흐르지 않았으나 새롭게 선보이는 만화는 형식에서 확 방향을 틀었다. “시사적인 내용을 담아 한 회로 완결한다”는 얼개가 파괴됐다. 최대 4회 분량의 단편만화가 이어지는데,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여러 인물 사이를 왕복한다. 만화는 진행되면서 거대한 밑그림을 드러내고 장편의 퍼즐 조각이 된다.

‘1회 완결의 시사만화’라는 얼개 파괴


연재를 시작하며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최규석씨는 지금 최고로 머리가 복잡하다. ‘새로운 형식’이니 기존에 참조할 것이 마땅찮다. 이야기 내용을 정하고 만화체나 톤을 ‘선택’해야 하는데 컷의 분할 정도 같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고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일주일마다 괴물 같은 ‘마감’을 마주해야 한다.

(사진/ 류우종 기자)

생활 사이클도 여기에 맞춰야 하리라. 우리는 그의 이런 복잡한 심사는 애써 모른 체하고, 얼굴을 내보내는 것만으로 팬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충만했다. 한 인터뷰어가 그와 만나고 나서 “잘생기고 몸짱인데 왜 영화배우는 안 하고 만화를…”(<딴지일보>)이라고 했을 만큼 그는 ‘훤칠하다’.

세심한 독자라면 알 터인데, 604호에는 ‘스폿’이 있었다. ‘만리재에서’의 그림으로 그의 만화책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길찾기 출간, 이하 <오마주>)에 실린 ‘사랑은 단백질’의 한 페이지가 실렸다. 2004년 발간돼 그해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받은 <오마주>는 거대한 신인을 예고하는 6편의 만화와 3편의 쪽만화가 실려 있다. 만화마다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솔잎’은 서울문화사 신인만화 성인지 부문에서 금상을 받았다.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군 입대로 인한 공백기로 그는 다시 시작해야 했다. 제대 뒤 2002년에는 ‘콜라맨’으로 동아-LG국제만화페스티벌 극화부문 대상을 받았다. 2003년 <영점프>에 ‘공룡 둘리’를 싣고, 이 작품으로 그해 ‘독자만화대상 단편상’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 대통령상’에 선정된다. 그리고 프랑스 앙굴렘에 초청됐다. 2004년부터 1년간은 <경향신문> 매거진X 만화섹션인 ‘펀’에 <습지생태보고서>(거북이북스 출간, 이하 <습지>)를 연재했다. 올 초에는 한겨레신문의 ‘문화계 샛별’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4년제 만화학과 대학의 첫 졸업생이다. <솔잎> <콜라맨> <선택> 모두 재학 중에 그렸다. “과제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그는 과연 자신을 모델로 삼은 <습지>의 ‘최군’을 ‘만년 장학생’으로 설명한다. 최군의 설명을 더 읽어보면 “3대째 내려온 가난 때문에 온몸에 궁상이 배어 있다. 입만 열면 청산유수로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 모순을 지적한다. 조잔하다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자격지심을 내비치는 것이 약점이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경지에 이르기 전, 이 책 작가의 말에서 밝힌 대로 깨달음이 있었다. “인간은 원래 극단적이지 않다”라는 진리였다.

'공룡둘리'

그는 ‘가능성이 극히 낮은 이성인이라는 상태를 향해 달려갈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원래 그런 거지 하며 쾌락 원리에 맞춰 살 것인가’라는 두 극단 사이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전자가 10대와 20대 초반의 그다. 그리고 이런 그를 만들어낸 것은 가난이다.

마법이 사라진 세상, 살아있는 진실

<오마주>의 주인공들은 가난하다. 그리고 꼬장꼬장하다. 그들은 분노하고 반성할 줄 안다. ‘공룡 둘리’에서 둘리는 프레스기에 손가락이 잘려 마법을 쓰지 못한다. 또치는 동물원에서 몸을 ‘팔고’, 희동이는 걸핏하면 주먹부터 나가는 청년이고, 도우너는 사기꾼이다. 길동은 도우너의 사기에 화병으로 죽었고, 아들 철수는 그 앙갚음으로 도우너를 외계연구소에 해부용으로 팔아넘긴다. 둘리는 도우너를 구하려고 한다. 둘리는 또치에게 “이제 제발 네 걱정만 하고 살아. 더 이상 명랑만화가 아니잖아”라는 말도 듣고, 마이콜과 술을 마시며 나에게 진심이 있었는가 한탄하지만, 그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과제에 열심이다. <선택>에서 주인공은 쓰레기 하나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고, 싸우지도 못하면서 맞는 애 앞을 가로막는 친구 앞에서 움찔한다. <콜라맨>에서 동네 정신지체 장애인을 속이고 부려먹던 소년은 성장하여 그를 찾아 요양원을 간다. 마법이 사라진 세상에 모든 것이 암울하지만 진심은 끈덕지게 살아 있다.

'습지생태보고서'

만화평론가 김낙호는 최규석을 가리켜 “청테이프를 붙일 줄 아는 작가”라고 말한다. <사랑은 단백질>에 나오는 청테이프는 갈라진 돼지저금통의 배를 붙이고, 빻은 닭뼈를 담은 컵을 풍선에 붙인다. 그렇게 죽은 영혼은 위로받는다.

‘극단만 있지 않다’는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그는 여전히 꼬장꼬장하다. 바뀌었다면 그 사실에 꼬장꼬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습지>의 원고료를 모아 목표했던 액수가 되었을 때 연재를 그만뒀다. 그에게 가난은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방식”이기 때문이었다.

연재를 시작하는 ‘대한민국 원주민’은 경상도 시골의 2남4녀 가족의 이야기다. 자전적 이야기가 섞인다니 역시 ‘가난’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다큐멘터리를 보면 원주민이 나온다. 그 사람들이 원래 살던 사람인데 어색해 보인다. 내가 마트에서 카트를 끌다 보면 갑자기 어색해진다. 일제부터 이어진 농촌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 그대로 갖고 살아온 하층민은 이 시대의 원주민이 아닐까.” 그 삶은 궁상스럽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지나다 보면 상추 심어놓은 밭 같은 게 있다. 근처 할머니들이 밭을 안 놀리느라고 그런 거다. ‘촌스럽다’는 느낌도 있지만 잔디밭보다 그게 자연스럽다.” 가난은 그가 유일하게 지닌 ‘완전한 부’다. 그의 만화 때문에 일주일이 빨리 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습지생태보고서'

'콜라맨'

'공룡둘리'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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