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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만년 2인자들의 엇갈린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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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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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인정의 현대캐피털 11년만에 정상, 한송이의 도로공사는 또 제자리… 언제나 꼴찌였던 흥국생명은 슈퍼루키 김연경이 있는 한 우승후보라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만년 2인자. 되씹어보니 참 잔인한 말이다. 백년도, 천년도 아닌 만년 동안 2인자라니. 만년 2인자라는 꼬리표는 정말 잔인한 족쇄다. 정상 정복의 가능성이 없다면 차라리 은퇴라도 하지. 만년 2인자는 포기도 못하는 잔인한 운명을 타고났다. 배구계에는 만년 2인자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두 팀이 있었다. 남자부의 현대캐피탈과 여자부의 한국도로공사. 올해로 두 팀의 운명은 갈렸다. 현대캐피탈이 만년 우승팀 삼성화재를 꺾고 11년 만의 챔피언에 올랐지만, 도로공사는 만년 꼴지팀 흥국생명에 밀려 만년 2인자의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만년 2위팀에는 만년 2인자가 있게 마련이다. 현대캐피탈의 후인정과 도로공사의 한송이는 팀의 에이스다. 올해의 배구 코트에서 후인정이 울었고, 한송이도 울었다. 후인정의 눈물이 감격의 눈물이었다면, 한송이의 눈물은 통한의 눈물이었다. 그렇게 2006 프로배구는 막을 내렸다.

후인정, 스커드 미사일처럼 매끈한


만년 2인자를 울리는 만년 1인자가 있게 마련이다. 현대캐피탈의 후인정은 삼성화재의 신진식과 93학번 동기생이다. 1인자와 2인자의 운명은 대학 시절부터 갈렸다. 신진식의 성균관대가 단골 우승팀이었다면, 후인정의 경기대는 단골 준우승팀이었다. 운명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실업과 프로에서도 신진식의 삼성화재가 9연패를 하는 동안 후인정의 현대캐피탈은 만년 준우승팀이었다.

얼마나 고대했던 우승인가. 현대캐피탈 우승의 주역인 후인정(왼쪽)과 루니가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추고 있다. 후인정은 승리 뒤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사진/연합 진성철기자)

승부욕 강한 신진식, 승부에 약한 후인정이라는 달갑지 않은 대립구도도 만들어졌다. 두 선수의 명암은 두 팀의 컬러로 이어져 결정적인 순간에 약한 현대캐피탈이라는 비아냥이 나왔다. 하지만 화교 출신 귀화인은 32살의 선수로서 황혼기에 마침내 우승의 꿈을 이루고, 만년 2인자의 꼬리표를 떼어냈다.

배구는 아름다운 스포츠다. 농구가 숨가쁘게 공수가 바뀌고 끊임없이 골이 터지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라면, 축구가 결정적인 한 장면으로 승부를 가를 수 있는 통쾌한 경기라면, 배구는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아하게 드러내는 스포츠다. 늘씬한 몸매의 배구선수가 발빠른 도움닫기로 뛰어올라 힘차게 하얀 공을 코트에 내리꽂을 때면, 한순간 명멸하는 불후의 조각상을 본 듯한 잔상이 남는다. 그만큼 스파이크는 신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더구나 배구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게임이어서 몸싸움이 없다. 스파이크의 아름다움은 몸싸움이 없는 경기라는 배구의 결점을 배구의 장점으로 바꿔놓았다. 몸싸움으로 저지당하지 않을 때, 스파이크의 아름다움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축구의 ‘매직’ 같은 슈팅을 보면서 인간 신체가 얼마나 끝없이 변형될 수 있는지에 놀란다면, 배구의 스파이크를 보면서는 인간 신체의 자유로운 표현이 얼마나 우아할 수 있는지에 감탄한다. 스파이크의 아름다움에서라면 후인정은 결코 2인자가 아니었다. 그의 별명은 스커드 미사일. 후인정의 몸은 스커드 미사일처럼 매끈하고, 후인정의 후위공격은 스커드 미사일의 궤적처럼 매끈하게 내려꽂힌다. 만약 배구가 심판이 채점하는 경기라면, 나는 신진식의 스파이크에 9.8점, 후인정의 후위공격에 9.9점을 주겠다. 전성기의 후인정은 말 그대로 새처럼 날아올라서 벌처럼 내리꽂았다. 배구선수치고 몸매가 아름답지 않은 선수가 드물지만, 후인정은 198cm의 키에 정말 ‘착한’ 몸매를 가졌다.

후인정의 현대캐피탈이 2인자에서 1인자로 날아올랐다면, 한송이의 도로공사는 아직 1인자로 비상하지 못했다. 올해 챔피언 결정전에서 한송이의 도로공사는 김연경의 흥국생명에 패했다. 도로공사는 지난해에도 KT&G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2006 챔피언 결정전에서 도로공사 에이스, 한송이의 분투는 눈물겨웠다. 도로공사의 쌍포 중 한 명인 임유진이 챔피언전을 앞두고 부상을 당하면서 한송이는 혼자 주공격을 감당해야 했다. 여자선수로는 힘겨운 2점짜리 후위공격을 쉴 새 없이 퍼부어야 했다. 챔피언 결정전 마지막 경기, 한송이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후위공격을 서너 차례 연속으로 하다가 끝끝내 네트에 공을 박아버리고 숨을 헐떡였다. 한송이는 준우승 징크스를 떨쳐버리겠다고 스스로 공표했고, 최선을 다했지만 승리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송이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경기당 30점이 넘는 ‘가공할’ 득점을 올렸지만 팀은 끝끝내 2위팀의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했다.

스파이크의 아름다움이여

솔직히 만년 2위팀보다는 만년 꼴지팀의 반란을 보고 싶었다. 창단 15년 동안 만년 하위팀에 머물렀던 흥국생명이 만년 2위라도 해본 도로공사보다 ‘더’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김연경의 위력을 실감할수록 도로공사가 안타까워졌다. 저토록 위력적인 김연경이 있는 한, 흥국생명은 만년 우승 후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흥국생명은 도로공사보다 젊은 팀이다. 도로공사가 혹시 이번에 우승 못하면, 앞으로도 만년 준우승팀에 그치지 않을까. 괜한 기우가 들었다. 김연경의 위력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어떤 슈퍼루키도 김연경만큼 데뷔 첫해에 프로경기 판도를 단숨에 뒤집어놓지는 못했다. 김연경의 위력은 예고된 것이었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고. 한송이의 사력을 다한 스파이크도 준우승팀의 징크스를 날려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젊은 한송이에게는 내일이 있다.(사진/ 연합 조용학 기자)

188cm의 김연경은 지난해 일본에서 열린 월드그랜드챔피언스컵대회에서 세계 정상의 대표팀들과 맞붙어 득점 랭킹 3위를 기록했다. 그 대회는 그의 첫 번째 성인 국가대표 출전이었다. 떠오르는 1인자 김연경의 미래는 창대할 수밖에. 이러니 챔피언전을 보면서 갈수록 도로공사에 마음이 쏠렸다. 하지만 도로공사는 여전히 2위팀이다. 한송이의 도로공사는 김연경의 흥국생명을 넘어설 수 있을까. 올해 22살 한송이에게 기회는 많다. 내년에는 우승컵을 들고 환호하는 한송이를 보기를. 마지막으로 누구처럼 보랏빛 꿈 하나. 젊은 선수들의 각축 속에 한국 여자배구의 전성기가 돌아오고 있다. 김연경에 김민지, 황연주, 한송이, 임유진, 김민지까지. 여자배구가 2000년대 초반의 침체기를 딛고 다시 한 번 올림픽 4강으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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