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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청나라의 힘’을 만든 황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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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2-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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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 최고의 전성기를 준비한 강희제와 옹정제… 중국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두 권의 책

1616년 누르하치가 전 만주를 통일하고 세운 청나라는 2대 황제 태종 즉위 이후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644년, 3대 순치제는 마침내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에 지배자로서 입성했다. 변방의 오랑캐 취급을 받았던 만주족이 인구가 거의 100배나 되는 대륙의 주인 한족을 물리치고 지배자로 등장한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볼 때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청조는 이후 300여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다. 청나라 이전에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이민족 국가들인 요나라와 금나라는 물론 천하무적처럼 보였던 몽골의 원나라도 1세기 넘게 한족을 지배하진 못했다. 반면 한족에 비해 문화도 뒤처졌고 인구도 적었던 신생왕조 청조는 이전 이민족 왕조들과는 달리 완벽하게 한족을 지배하면서 300년 동안 왕조를 이어나갔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강희제, 검소함과 실용적 가치관

사진/강희제. 45살의 모습.
청조가 자존심 강하고 인구도 압도적으로 많은 한족을 지배하는 기초를 굳건히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왕조 초기에 나라의 기반을 다진 뛰어난 세명의 황제 덕분이었다. 유교를 바탕으로 관대한 정치를 행했던 강희제, 강력한 황제 정치로 왕조의 성숙을 이뤄낸 옹정제, 그리고 화려한 대외원정으로 전 아시아에 위세를 떨쳤던 건륭제가 바로 청조의 3대 명군들이었다. 약 100여년 동안 계속된 이들의 집권기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대로 손꼽힌다.


최근 이 세 황제 가운데 강희제와 옹정제의 전기 두권이 함께 나왔다. 중국·일본 관련서적 전문출판사인 이산출판사가 펴낸 <강희제>(조너선 스펜스 지음·이준갑 옮김/ 1만1천원)와 <옹정제>(미야지키 이치사다 지음·차혜원 옮김/ 9천원). 미국 예일대학 석좌교수인 스펜스와 일본 교토대학 교수였던 미야자키는 모두 평생 중국을 연구한 역사가들로 풍부한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두 황제의 정치철학과 인간적인 내면의 모습을 그려냈다. 두 책 모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서 눈높이에 맞춰져 있고 재미난 일화들이 풍성해 쉽게 읽을 수 있다.

<강희제>의 지은이 스펜스는 강희제가 남긴 서간과 공문서를 분석해 강희제의 자서전 형식으로 책을 썼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강희제는 자기 실수를 쉽게 뉘우칠 정도로 솔직했고 호방하면서도 치밀한 인간적인 군주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공학적, 의학적 기량을 높이 평가해 궁정사업에 서양 선교사를 참여시킬 만큼 고정관념이 없었고, 관료들이 황제와 1대1로 직접 주고받는 비밀통신체계인 ‘주접’제도를 발전시켜 신하들을 효율적으로 부리는 등 보스기질이 뛰어난 황제였다. 한족과는 달리 형식에 치우치지 않는 만주족 특유의 과단성과 검소함, 그리고 실용적 가치관을 가졌던 것도 그가 선정을 베풀 수 있었던 밑바탕이었다. 강희제는 자식들에게 “수천냥짜리 모피외투를 가지러 조르지 마라.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유행은 변한다”고 글을 남겼을 만큼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역대 중국 황제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옹정제의 금욕적인 삶

그의 아들 옹정제는 재위기간이 61년이나 됐던 장수 황제였던 아버지에 비교하면 매우 짧은 기간인 13년 동안 옥좌에 앉았다. 때문에 그의 이름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에 비해 사람들에게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옹정제의 집권기를 강희제나 건륭제보다도 중요한 청조 역사의 핵심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옹정제에 대해 연구하는 ‘옹정학’이란 분야도 있을 정도다. 지난 1950년 출판된 미야자키의 <옹정제>가 바로 옹정학을 촉발시킨 도화선 역할을 했던 책이었다.

스케일이 크고 무인 기질이 강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꼼꼼하고 섬세했던 옹정제는 황제 재위기간 동안 한 차례도 베이징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을 정도로 일에만 매달렸던 ‘일 중독증’ 황제였다. 거실에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좌우명을 새겨놓고 평생 그 원칙을 지켰고, 형제와 가족에게도 비정할 정도로 냉정하게 대했다. 남의 부정을 용서하지 않는 동시에 황제 스스로도 수도승처럼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숨진 뒤 그의 아들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처럼 관대한 정치로 돌아섰지만 옹정제의 엄격한 정치가 없었다면 청조는 무너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사진/왕후이의 <강희남순도>. 강희제가 지방관들의 사기를 북돋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모두 여섯 차례 남방을 순행했던 모습을 그렸다.
19세기 이전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천자, 즉 황제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중국에서 천자의 권위는 그야말로 인간이 아닌 ‘신’에 가까운 절대자였다. 황제 혼자만이 남쪽을 바라보며 세상을 굽어보았고, 모든 신하는 북쪽으로 얼굴을 향해 천자를 우러러보아야 했다. 황제 혼자만이 붉은 먹물로 글씨를 쓸 수 있었고 모든 신하는 검은 먹물만을 썼다. 모든 문서에서 ‘황제’라는 단어가 나오면 반드시 줄을 바꿔 시작해야 했다. 천자가 이처럼 무한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천자의 개인적 능력이 중국 역사에 끼치는 영향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컸다. 강희제와 옹정제는 이런 절대권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파벌과 부패의 온상인 관료사회를 약화시켰다. 이들의 개혁은 한족 지배계급들에게는 반감을 불렀지만 세금 부담과 강제 노역이 훨씬 줄어든 일반 백성들에게는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청조가 등장하기 직전 왕조인 명나라 말기의 혼란상도 이들의 개혁정책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명나라 말기의 황제 승정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능해 말타기를 배우다가 시종들이 말을 붙들고 있는데도 말에서 떨어지자 곤장으로 말의 볼기를 40대 친 뒤 말을 변방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궁궐을 꾸미려고 가져온 돌이 너무 커서 궁궐 대문을 통과하지 못하자 돌에 곤장을 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지방관리들은 국가의 세금 이외에 멋대로 부가세를 부과해 봉급의 1천배 이상을 착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은 비록 이민족이라도 청조를 환영했다. 그러나 이 세 황제 이후로 청나라는 두번 다시 이러한 황금기를 이뤄내지 못하고 서구 열강에 시달리다 300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독재는 길들여진 대중을 낳고

사진/옹정제.
두 책은 모두 황제의 일생을 구체적인 사실로 설명하면서도 문학적 재미를 곁들여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다. 진정 훌륭한 황제라면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룩할 수 있는지를 훈계조가 아니라 읽다보면 절로 느끼게 해준다. 동시에 중요한 역사적 교훈도 함께 덧붙여 독자들로 하여금 현재의 상황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미야자키는 <옹정제>를 통해 아무리 뛰어난 독재라도 독재는 그 자체로 폐해를 남긴다는 점을 강조했다. 강희제와 옹정제가 비록 ‘선의와 양심을 바탕으로 하는 독재’를 펼친 훌륭한 황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절대왕권이 결국 중국 국민들을 독재에 길들여지게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유능한 독재자가 등장하면 정치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지만 독재체제의 결함이 드러나도 독재에 길들여진 대중들이 다시 독재체제를 희구하는 악순환이 등장하는 점을 그는 역사가의 안목으로 짚어냈다. 실제 미야자키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막 출범한 직후인 1950년 중국 공산당 정권이 옹정제식의 선의의 독재를 다시 시도한다면 비극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경고는 이후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마오쩌둥체제의 몰락으로 입증됐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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