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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어느 자유주의 지사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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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04 00:00 수정 : 2008-09-1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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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신작소설 <보이지 않는 손>이 설파하는 시장의 신성함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복거일씨는 자신의 신작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손>(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어떤 뜻에선 자서전”이라 말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는 내 작품들의 마지막에 놓일 것”이라 선언한다. 이 장엄한 ‘작가의 말’ 때문에 나는 지금 이 기사를 쓰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소설가 현이립은 넌지시 언질만 한 번 주고는 자신의 작품에서 설정을 훔쳐 영화를 만든 제작사에 분노한다. 그는 소송을 제기하고 청탁받은 글을 쓰기 위해 40년 전 군 생활을 한 지역을 돌아본다. 그러곤 자신이 소송에 패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이 소설은 전적으로 주인공의 기나긴 독백과 웅변에 의지하고 있다. 이 소설의 ‘소설적 가치’에 대해 길게 논의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순수한 자유주의자라 주장하는 어느 보수주의자가 어떤 사유의 경로를 밟아 지금 ‘마침표’를 찍는가이다.

지사적 풍모의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은 그가 자유주의자이며 주변부 지식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1900년부터 좌파가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라 부르며 순수한 자유주의자들의 이름을 더럽힌 사실에 분노를 금치 못한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며 사태는 더욱 가관이다. 성스러운 자본주의, 보이지 않는 손. 이 이름들에 대한 옹호의 밑바탕에는 진화생물학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태초에 유전자가 있었다. 유전자는 환경에 적응하며 개체들을 복제해 나간다. 개체들은 자유의지로 생존하지만 진화 과정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사회정의는 선험적으로 주어지거나 법이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존과 진화의 결과물이다. 이런 관점이 사회로 이어질 때 자본주의의 성스러움이 설명된다.

주변부 지식인의 처지도 진화의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서구 문명이 다른 문명들을 누르고 상승한다. 이것이 주변부로 격렬하게 쏟아진다. 영어가 아닌 모국어는 이런 진화의 과정에서 가까운 미래에 도태될 것이다. 주변부 지식인은 기껏해야 중심에서 발견한 것을 재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지식인은 유전자와 달리 문화와 지식을 복제하는 단위들을 찾아내는 존재다. 그는 주변부 지식인이 밈을 찾아내려면 논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극치’로 나타난다. 최소 단위들의 구성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세계 전체로 확대한다. 이건 그가 ‘미신’으로 부를 정도로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가 찾아낸 길에 ‘악플’을 달 생각은 없다. 다만, 이처럼 해박한 지식을 가진 지은이가 왜 90년대 이후 더욱 강고해지는 자본주의적 가치가 위기에 처했다고 상실감에 젖는지 궁금하다. 게다가 순결한 개인주의자가 왜 군대시절의 전체주의적 경험을 그렇게 미화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과학과 종교와 예술을 지식의 관점에서 통합하는”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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