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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부끄러움이 녹은 씻김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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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2-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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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과 타악·피아노·인디음악에 어린이합창단이 어우러진 추모앨범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은 추모앨범이다. 우리가 베트남 땅에서 양민에게 총질했다는 사실에서 비롯하는 부끄러움에 대해 고백하는 일종의 양심선언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치적인 추모앨범을 내야 하는 한반도 남녘 땅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 조건은 착잡하고도 복잡하다. 이 추모는 자기 분열적인 추모이다. 우리는 강간당한 적이 있고 그 기억을 씻을 길 없어 멍하니 타령 부르는 사람들이고 또 그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가운데 남의 나라 가서 강간을 하고 만 사람들이다. 무엇으로 그들을 달래고 무엇으로 우리를 달래랴! 세계의 누구도 이런 ‘추모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없다. 단지 우리에게만 있는, 설움받아 나온 타령의 가락으로 남에게 설움을 안긴 죄를 뉘우치고 그들 혼백마저 달래야 하는 문화적 조건에 있는 나라, 바로 남한이다. 대한민국,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다.

너-나의 씻음, 그 신호탄을 쏜 음악인들


사진/지난해 7월6일 숭실대 한경직 기념관에서 열린 '사이공 그날의 노래' 평화음악제. <미안해요 베트남> CD는 이날 모인 음악인들의 의기투합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강창광 기자)
우리가 베트남에 갔던 때는 지나갔다. 시간이 흐르고 전쟁은 끝났다. 미국은 난생처음 ‘패전국’이 되었고 역사적인 부채의식에 시달렸다. 베트남에서 몸을 빼낸 우리는 다시 아랍의 사막으로 나섰고 100억달러 수출탑을 세웠으며 반도체 기술을 베껴 반도체 수출국이 되었다. 그동안 배곯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저씨들은 고엽제 후유증 때문에 온몸이 곱았으며 그중 일부는 양민을 학살했다는 가책 때문에 괴로워했다. 이제 우리는 돌아볼 시기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살아온 것이냐.

이 음반을 기획한 사람은 지금은 순천대 교수로 있는 박치음이라는 음악가이다. 그는 예전에 시위 현장에 울려 퍼지던, ‘반전 반핵, 양키 고홈!’이라는 구호가 강력한 랩처럼 치고 나오는 <반전반핵가>를 지은 작곡가다. 그의 기획 아래 국악하는 원일, 타악하는 젊은 집단 공명, 인디음악하는 어어부, 의식있는 싱어송 라이터 이지상과 김영남, 피아노 치는 노영심, 그리고 아름나라 어린이 합창단이 모였다.

노래의 장르들은 다양하다. 공통점을 찾으라면 한국음악판의 ‘주류’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시도로 그 주변부에 놓이면서 좀더 실험적이고 도발적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들의 음악이 대부분이라는 점. 물론 그렇지 않은 스타일도 들어와 있으나, 이 음반을 통해 그러한 통속성까지도 추모의 느낌에 참여하고 나름대로 의미있게 자기정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끔 우리 로큰롤을 듣다가 눈물이 나온다. 이게 누구의 음악이냐. 이 제대로 녹음되지도 않고 뽕짝이랑 뒤섞인 쓰레기 같은 음악은 누구의 음악이냐. 그렇다고 순수한 국악이면 우리 음악이냐. 아니다. 쓰레기더미에서 쓰레기 파헤치며 모방하고 곱씹고 양키의 팔군 무대에 작달막한 키로 서서 경멸받으며 욕먹으며 배우고 하여 겨우 건진 이 국적없는 양공주의 음악이 우리 음악이다. 보라. 누가 제대로 살아왔느냐. 우리 식 로큰롤은 도대체 세계 어느 구석빼기에서 나온 장돌뱅이 음악이냔 말이다.

솔직하게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면, 그게 바로 우리의 음악이다. 한숨 걷고 눈물 씻으며, 조금은 신파조로 말하자. 바로 그 설움덩어리가 우리 음악이다. 베트남 양민 학살을 추모하는 <미안해요, 베트남> 모음집을 들으면서 내게 든 생각은 그런 생각이다. 이 대목에선 조금이라도 순수한 척하거나 잘난 척하거나 ‘그래도 나는 낫지’ 하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양민 학살을 제대로 추모할 수 없다. 어어부처럼 자폐적으로 우악 우악 뇌까리거나, 공명처럼 둥둥 멍하니 울려대거나 누구누구처럼 하염없이 피리를 불거나 또 누구누구처럼 한음 한음 단선율로 피아노를 치거나 하며 우리를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 어느 때보다도 추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하게 우리 자신이어야 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게 그들의 설움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설움의 일부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노래들은 그 ‘맴돌이 인식’의 주위를 맴돈다. 어디 멀리 가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 똬리친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그 음악들은 일종의 내면적인 씻김굿이다. 이 음반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씻김굿이 되려면 갈 길이 멀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더욱 헐벗은 채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 기나긴 ‘너-나의 씻음’의 출발점에서 신호탄을 쏘는 일을 가까스로 한 사람들의 손을 본다. 피묻은 그 손이 퉁기는 기타의 곡조를 듣는다. 그 손은 ‘평화, 평화’ 하고 낮게 흐느낀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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