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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종 차별 시스템을 분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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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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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파고든 지독한 편견을 세밀하게 드러낸 영화 <크래쉬>… 누구나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복잡한 퍼즐 속에서 화해 시도하지만…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크래쉬>(Crash)는 인종 충돌에 대한 영화다. 집단적인 폭동은 아니고, 일상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다. 배경은 로스앤젤레스(LA). 미국에서도 다른 인종들이 서로 뒤섞여 사는 대표적인 도시다. <크래쉬>는 자동차의 ‘충돌’(crash), 접촉사고로 시작한다. <크래쉬>에서 충돌은 접촉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영화 첫 부분에서 흑인 형사 그레이엄(돈 치들)은 말한다.

이란인은 “빈라덴족”이라는 조롱을 듣고(왼쪽), 멕시칸 어린이는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구하고(가운데), 흑인 경찰은 동생을 잃는다(오른쪽). <크래쉬>가 묘사하는 미국의 풍경이다.


“LA에서는 아무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아. 모두 금속과 유리 안에 갇혀 있지. 서로에 대한 느낌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서로 충돌하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레이엄은 교통사고 현장 옆 살인사건 현장에서 동생의 주검을 발견한다. 그리고 영화는 36시간 전으로 돌아가 인종문제가 겹치는 일상을 보여준다.

병원 앞에 버려진 ‘불쌍한’ 한국인

<크래쉬>는 인종 간 충돌을 그리지만, 사람들의 접촉을 옹호하는 영화다. 미국 이민국에서 만든 홍보영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인종 갈등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녹록지 않다. <크래쉬>에서 8쌍의 커플은 꼬리를 무는 사건과 관계로 이어지면서 미국의 인종 문제에 대한 풍경을 그려낸다. LA 지방검사인 백인 릭(브렌든 프레이저)과 부인 진(샌드라 불럭)은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흑인 청년 앤소니(루다크리스 브리지스)와 피터(라렌즈 테이트)를 보고 움찔한다. 평범한 대학생처럼 보이던 청년들은 갑자기 백인 부부의 자동차를 강탈한다. 백인 경찰 라이언(맷 딜런)은 순찰을 돌다가 릭 부부가 강탈당한 차종과 같다는 이유로 흑인 부부 캐머런(테렌스 하워드)과 부인 크리스틴(탠디 뉴튼)을 검문한다. 라이언은 크리스틴을 검문하면서 성추행하지만, 캐머런은 무력하게 저항하지 못한다. 오만한 백인 경찰 앞에서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흑인의 처지가 신랄하게 묘사된다. 이렇게 사건과 관계로 이어지면서 백인과 흑인, 흑인과 히스패닉, 히스패닉과 아랍인의 갈등이 드러난다. <크래쉬>는 인종이 문제가 아니라, 인종에 묻은 선입견이 문제라고 말한다.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서로에 대한 무지가 비극을 불러온다고 말한다. 이렇게 인종차별은 저절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돼버렸다고 묘사한다.

<크래쉬>의 장점은 무엇보다 인종차별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개인에게 개입하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영화에서 인종차별하는 ‘놈’에게도 나름의 알리바이는 있고, 인종차별당하는 사람들도 결백하지만은 않다.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경찰 라이언도 집에서는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착한 아들이라는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흑인을 싫어하는 이유도 흑인들이 배은망덕하게 아버지의 인생을 망쳐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색인종이라고 반드시 인종차별을 당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라이언에게 인종차별을 당한 보험회사 직원인 흑인은 자신의 쥐꼬리만 한 권력을 이용해 라이언에게 복수하기도 한다. 그리고 더 소수 인종인 아시아인에게는 차별적인 말로 쏘아붙이기도 한다. 이처럼 <크래쉬>에서 인종차별의 피해와 가해는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래쉬>는 예상을 깨고 작품상을 받았다. 인종차별이라는 주제가 아카데미 투표인단의 구미에 맞았다는 분석이다. 감독 폴 해기스(오른쪽)가 기뻐하고 있다.

소수 중의 소수는 또다시 무시당하거나 차별당한다. <크래쉬>는 인종의 전시장인 미국에서 인종 간의 차이가 무시되는 방식을 놓치지 않고 묘사한다. 백인뿐 아니라 흑인도 히스패닉 안의 차이를, 아시아인들의 차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동양계는 모조리 중국인으로 간주되고, 이란인(페르시아인)은 역사적으로 앙숙지간인 이라크인(아랍인)으로 오인되고, 히스패닉은 모두 멕시칸으로 여겨진다. 이란인을 부르는 이름은 “빈라덴족”이 된다. 흑인 형사 그레이엄은 그의 파트너이자 애인인 리아(제니퍼 에스포시토)를 “백인”이라고 했다가 “멕시칸”으로 고쳐 부른다. 하지만 리아는 “나는 멕시칸이 아니고, 아버지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어머니는 엘살바도르 출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레이엄은 “그런데 남미 출신들은 어디서 오든 사는 게 비슷하냐”고 대꾸한다.

이처럼 <크래쉬>가 묘사하는 인종 문제는 일상에 파고든 지독한 편견이고, 가해자도 피해자도 뚜렷하지 않은 복잡한 퍼즐이다. 그리고 힘있는 소수는 힘없는 소수를 이용하거나 차별하기도 한다. 흑인 탈취범이 모는 차에 치해 심하게 다치고도 병원 앞에 버려졌던 ‘불쌍한’ 한국인은 알고 보면 동남아시아인들을 인신매매를 하려다가 사고를 당했던 인물로 밝혀진다. 남편의 이름을 울부짖으면서 병원으로 뛰어들어오는 한국인 아내의 모습이 한국인의 가족주의를 묘사한단다. 병상에 누워서도 인신매매해서 받은 수표를 현찰로 빨리 바꿔오라고 말하는 남편의 모습은 한국인의 ‘돈벌레’ 이미지를 드러낸다.

화해의 장치로 아카데미 표 얻었을까

<크래쉬>는 차별의 현실을 드러낸 다음, 차이의 봉합을 시도한다. 백인 경찰에게 성희롱을 당했던 흑인 여성은 두 번째 조우에서 백인 경찰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된다. 열쇠수리공인 멕시칸이 자신의 가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믿는 이란인은 멕시칸을 찾아가 그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난다. 흑인 청년들에게 자동차를 강탈당하고 불안감에 시달리던 백인 상류층 여성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겪으면서 히스패닉 가정부를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인다. 정작 인종 간 화해를 시도했던 인물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인종차별을 하는 선배 경찰에게 저항했던 백인 경찰 핸슨(라이언 필립)은 흑인 청년에게 선의를 베풀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핸슨도, 아니 누구도 벗어나기 힘든 인종적 선입견이 비극을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이처럼 화해를 시도하지만 비극을 피할 수 없는 <크래쉬>에는 밝은 거리가 나오지 않는다. 언제나 회색빛 거리가 화면을 음울하게 물들인다.

<크래쉬>는 2006년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을 휩쓸었다. 게이 카우보이의 사랑을 다룬 <브로크백 마운틴>을 제치고 예상 밖의 작품상을 받은 것이다. 인종차별을 다루되 화해의 장치를 잊지 않는 <크래쉬>는 동성애를 다룬 <브로크백 마운틴>보다 아카데미 투표인단에게 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크래쉬>는 미국인 모두, 특히 인종차별의 가해자로 여겨지는 백인들에게는 ‘죄 사함의 편안함’으로 읽힐 여지도 없지 않다. 아카데미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불편함보다 <크래쉬>의 위안을 선택했다. <크래쉬>는 저예산 영화이지만 샌드라 불럭 같은 블록버스터급 배우들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이들은 거의 무료로 저예산 영화에 출연했다. 이들의 연기 앙상블은 영화의 또 다른 볼거리다. 총제작비 650만달러가 들어간 <크래쉬>는 미국에서만 55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아카데미 수상 이후에는 미국에서 재개봉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4월5일 개봉한다. <크래쉬>의 감독 폴 해기스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각본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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