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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씁쓸하고 어지러운 ‘굿바이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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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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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미술계와 유족 간 불협화음 속에 치러진 49재 추모 퍼포먼스… 조카가 준비한 바이올린 부수기, 전국 소규모 국지전 제각각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여전히 ‘굿바이 백남준’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멀쩡한 바이올린 100대를 내리쳐 부수고, 건반에 촛농이 떨어진 파이노를 넘어뜨려도 백남준의 혼은 고향 땅에서 안식을 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백남준의 유족 쪽과 국내 미술계의 껄끄러운 관계는 고인을 다시 떠나보내는 자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3월18일 서울 봉은사에서 열린 백남준 49재 추모행사는 뒷말이 무성했다. 무작위로 뽑힌 추모객들이 바이올린 100대를 일제히 쇠파이프에 내리치고 있다.

지난 3월18일 저녁 서울 봉은사에서 열린 49재는 백남준을 기억하는 다양한 퍼포먼스로 관심을 모았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뉴욕 백남준 스튜디오는 ‘즐거움’(fun)을 주제로 시민과 더불어 고인의 뜻을 살리려 했다. 하지만 ‘백남준식’ 즉흥예술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경기문화재단 대표 등 봉은사 못 들어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 아티스트인 백남준의 예술적 성취를 기억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뉴욕 스튜디오 디렉터이자 백남준의 장조카인 켄 백 하쿠다는 고인이 사인한 바이올린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끌어당기는 동작을 보여줬다. 백남준이 1961년 독일에서 발표한 <바이올린과 끈>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49재에 참석한 조문객 가운데 무작위로 뽑힌 시민 100명은 바이올린을 일제히 내리치는 <바이올린 하나>의 주인공으로 나섰다. 누구나 행위예술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셈이다. 더러는 바닥에 흩어진 바이올린 조각을 챙기며 백남준의 흔적에 감격해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백남준은 대중과의 교감 속에서 고향의 품을 느낀 듯하다. 하지만 백남준 추모 행사를 둘러싼 불협화음으로 인한 국내 미술계의 ‘수모’는 오래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무려 300억원의 예산을 쏟아부어 ‘백남준미술관’을 건립하는 경기문화재단 송태호 대표는 봉은사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고, 국립현대미술관 김윤수 관장은 주최 쪽에서 ‘인간적 모욕’에 가까운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동안 시장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백남준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 혹은 이권과 무관하지 않다. 백남준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물려받은 뉴욕 스튜디오의 입김에 미술계가 농락당한다는 지적도 있다.

백남준이 떠난 자리에 불신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손학규 경기지사(맨 오른쪽)는 지난해 6월 미국 방문 중에 뉴욕 ‘그린 스튜디오’에서 백남준을 만나 백남준미술관 건립 계획을 밝혔다(오른쪽). 경기문화재단과 백남준스튜디오의 갈등으로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

이런 미술계의 잡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백남준은 지난 18일 추모제 때 봉은사 법왕루에 설치한 유작 <엄마>까지 1천여 점의 작품을 발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중앙홀에 1003개의 텔레비전 모니터를 탑처럼 쌓아올린 <다다익선>(1988)이 제작비가 7억원 이상 들어가는 대작에 견줘 <엄마>는 특유의 비디오 콜라주 기법에 시적인 표현을 담은 작품이다. 이런 작업은 ‘미디어 아트’라는 장르로 정착돼 수많은 계승자들이 뒤를 잇고 있다. 이들이 백남준의 후예임을 자임하지 않을지라도 비디어 아트의 진화 경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어쩌면 백남준의 예술 자체가 하나의 해프닝성 퍼포먼스였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바지가 내려가게 내버려둔 게 고난도 퍼포먼스였던 것처럼. 그런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기존의 권위적인 예술에 대한 통념을 깨뜨리고 작가적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대전에 거주하는 행위예술가 류환(44)씨도 백남준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자양분을 얻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었다.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렸을 때 예술적 감흥이 살아난다는 것을 확인하게 했던 것이다.”

“우리 식대로 백남준을 보내련다.” 국내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이 전국 10개 도시에서 백남준 추모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다다익선> 앞에서 여성 퍼포머가 여성의 몸으로 번안한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이렇게 백남준의 정신을 수혈받은 류씨는 추모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지난 2월7일 대전시립미술관 로비에 있는 백남준의 작품 <프랙탈 거북선>(1993) 앞에서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 퍼포먼스를 선보인 류씨는 49재를 앞두고 ‘일’을 벌였다. 전국 10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백남준의 식별표지로 알려진 여러 행위를 재연하거나 패러디하는 추모 퍼포먼스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퍼포머는 모두 100여 명. 이들이 지역별로 참여해 신체에 물감이나 마요네즈 등을 바르고 넥타이를 자르거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부수며 머리에 먹물을 묻혀 선(禪)을 떠올리게 하는 글씨를 새기는 등의 퍼포먼스를 구상했다.

류환씨 등 100여 명, 바르고 부수며 소박하게

여기에 백남준의 작품을 둘러싼 ‘소음’이 끼어들 리 없었다. 대한민국 퍼포먼스 작가연합이 뜻을 모았다. 전국 10개 지역에서 열린 추모 퍼포먼스는 서로 논리적인 연결 구조를 갖지도 않았다. 바이올린 100대도 필요치 않았으며 굿 제단을 쌓아올리지 않아도 백남준의 담론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한국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무대로 삼았지만 이벤트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지난 18일 오후 2시 대전 중구 은행동 으능정이 문화예술거리에서 열린 류씨의 퍼포먼스는 ‘예술혼이여 영원하라’는 주제로 인간과 하이테크놀러지의 만남을 표현했다. 이날 행인들은 류씨가 자비 80만원으로 구입한 중고 피아노와 첼로로 파괴의 미학을 체험할 수 있었다.

전북 전주 지역 퍼포머들은 백남준의 작품을 패러디한 <굿모닝 미스터 백남준>을 선보였다.

이날 퍼포먼스는 상반신 전체를 파란색 물감으로 칠한 류씨가 우산을 든 다른 퍼포머의 온몸을 흰 천으로 두르고 검은색 끈으로 동여매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서 류씨는 커다란 망치로 피아노에 내리치고 퍼포머의 몸에 걸린 시계를 깨뜨려다. 백남준이 ‘뒤셀도르프 갤러리 22’에서 선보여 세계적으로 존재를 알린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경의>(1959)를 재현한 것이었다. 백남준의 예술혼에 반한 류씨에게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사항이 있다. “백 선생이 국내에서 작업을 했다면 고물상 아저씨의 장남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백남준미술관도 필요하지만 그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는 차원에서 국내 퍼포머들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런 류씨의 바람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같은 날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다익선> 앞에서 열린 서울지역 추모 퍼포먼스에 참여한 성능경(62)씨도 마찬가지였다. 1세대 퍼포머로 언론의 구실을 주문하며 <1974년 신문 6월1일 이후>라는 작품을 선보인 성씨는 아방가르드 실험기를 거쳐 개념미술가로 탈장르 퍼포머로 무대를 지키고 있다. 이날 성씨는 추모 퍼포먼스에서 추도문을 읽은 뒤 “예술은 사기다”라고 했던 백남준의 발언을 패러디해 “백남준의 예술은 사기다” “백남준의 예술은 비웃음이다”라고 소리쳤다. 전국적인 추모 퍼포먼스 열기가 일시적인 ‘백남준 현상’에 머물 것을 미리 염려한 탓이었을 것이다.

"백남준의 예술은 사기다" 패러디의 추모

지금 백남준이 살아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컴백 홈’을 환영하는 현수막 너머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무리들에게 “어떤 씨팔놈이 잡소리야? 어떤 놈이아? 나와!”(1995년 광주비엔날레 피아노 퍼포먼스 공연장에서의 백남준 발언 패러디)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한국에 돌아오지 않는 게 나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어디론가 발길을 옮겼을 수도 있다. 국내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퍼포머들이 자신을 흉내내는 몸짓에 박수를 보내기 위해. 백남준을 따라 하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국내의 퍼포머들. 그들에게서 예술혼을 찾는 게 ‘백남준다워’ 보인다면 혼자만의 ‘오버’일까.

대전의 퍼포머 류환씨가 몸에 물감을 바르고 중고 피아노를 부수고 있다.

지난 2월7일 대전시립미술관 <프랙탈 거북선> 앞에서 공연하는 류환씨.

백남준 추모 퍼포먼스에 참여한 국내 1세대 퍼포머 성능령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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