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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리가또 이치로, 덕분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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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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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로 아시아의 자부심이 된 ‘호타준족’의 WBC 악당 연기… 신체조건 넘은 드라마, 여전히 일품인 스몰 베이스, 여기에 성숙미만…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21>은 601호 표지이야기로 아시아 기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스포츠·문화 분야의 정리를 맡게 됐는데, ‘가장 뛰어난 아시아 스포츠 선수’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일본의 이치로, 중국의 야오밍이 선두를 다투었다. 설문을 정리하면서 과연 나라면 누구를 최고로 꼽았을까, 생각해보았다.

오른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치는 이치로의 시계추 타법은 그의 늘씬한 각선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왼쪽).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이치로의 입에서는 열불이 쏟아져나왔다. 그의 ‘곤조’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사진/EPA/ FRANCK ROBICHON)

‘현역’이라면 이치로를 꼽았을 것 같았다. 아시아인의 신체조건으로는 도저히 세계 정상급이 되기 불가능한 스포츠로 생각되는 농구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야오밍은 대단하다. 하지만 야오밍은 226cm의 동양인답지 않은, 아니 서양인을 능가하는 신장에 거구를 무색하게 하는 유연성까지 타고났다. ‘타고난’ 야오밍에게는 어떤 한계를 돌파하는 드라마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치로에게는 신체조건을 뛰어넘는 드라마가 있다. 180cm에 71kg. 동양인다운 호리호리한 체형에 메이저리그 최다 안타 기록이라니, 여전히 믿기지 않는 기록이다. 그는 동양인의 ‘연약한’ 몸으로 2004년 262개 안타를 쳐서 메이저리그 한 시즌 역대 최다 안타 기록을 세웠다. 게다가 반짝하지 않고 꾸준했다. 2001년부터 5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그의 활약은 일본인의 자긍심뿐 아니라 아시아인의 자부심을 높이는 사건이었다.


방망이를 든 사무라이의 ‘니폰 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이치로는 ‘방망이를 든 사무라이’였다. 그의 “30년” 발언에 한국 선수들의 승부욕은 자극됐고, “굴욕” 운운은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여주기에 충분했다. 혹시 “” 하면서 뿜어져나오는 ‘불’을 보았는가. 한국에 두 번째 지고 덕아웃을 돌아보면서 소리치는 이치로의 입에서는 열불이 쏟아졌다. 또 한 명의 영웅 마쓰이는 대회 참가를 거부했지만, 이치로는 주장까지 맡아가며 선봉에 섰다. 평소의 이치로는 언론 관계도 불편하고 조용한 선수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WBC의 이치로는 일본 혼의 현현처럼 보였다(물론 한국 언론이 기사를 ‘만들기’ 위해 부풀리기도 했겠지만). 그라운드 바깥의 언행뿐이 아니다. 야구 스타일에서도 일본의 자부심이 넘쳐난다. 일본이 만들고 자부하는 ‘스몰 베이스볼’의 핵심은 이치로의 몸에 새겨져 있다. 이치로는 잘 치고 잘 달리는 ‘호타준족’이라는 사자성어(?)의 완벽한 현현이다. 그는 힘이 달리면 스피드로 채우고, 1루타밖에 못 치면 훔쳐서라도 2루에 가고, 공격이 약하면 수비로 메워야 한다는 스몰 베이스볼의 이상형을 그라운드에서 현실로 바꾸어낸다. 평범한 내야 땅볼을 내야 안타로 만드는 능력이 없었다면, 메이저리그 최다 안타 기록 달성은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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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는 잘 던지고 잘 막아낸다. 그의 강한 어깨는 빠른 발 못지않은 ‘아시아 보물급’이다. 호타준족은 일본 야구의 대명사 같았다. 다른 일본 선수들도 ‘호타’와 ‘준족’의 겸비라는 측면에서 한국 선수들보다 앞서 있었다. 한국 야구가 재능의 분산에 역점을 둔다면, 일본 야구는 재능의 결합에 강조를 두었다. 일본은 포르노부터 애니메이션, 광고까지 그들만의 스타일을 창조했다. 일본 스타일에는 ‘누가 뭐라든 우리에게는 우리의 기준이 있다’는 도도함이 배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촌스러워도 우리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나아가 우리의 기준이 세계 최고라는 도도함. 스몰 베이스볼에도 그런 자긍심이 풍긴다. 오 사다하루 감독이 “스몰 베이스볼로 세계를 정복하겠다”고 호언했을 때, 솔직히 코웃음을 쳤는데, 어쨌든 정말로 그들은 해냈다.

이치로의 외모도 ‘니폰 필’을 팍팍 풍긴다. 긴 다리에 쭉 빠진 몸, 수염 기른 얼굴까지. 그의 외모는 야구 만화의 캐릭터를 완벽에 가깝게 재현한다. 게다가 이치로는 유명 인사, 셀리브리티(celibrity)로서 매력도 갖추고 있다. 이치로의 아내는, 베컴의 아내 빅토리아만큼 셀리브리티는 아니지만, 아나운서 출신이다. 이치로와 8살 연상의 후쿠시마 유미코의 결혼은 화제를 모았다. 만화야구 주인공 같은 이치로가 만화 주인공의 대사 같은 과장된 말들을 쏟아내니, 정말 재미있을 수밖에. 그리하여 한국인의 ‘애국심 게임’에 이치로는 완벽한 악당이었다. 덕분에 즐거웠다, 이치로! ‘입치료’라고 조롱하면서 즐거웠고, 일본판 ‘용가리쇼’를 보면서 즐거웠다. “아리가토, 이치로!” 참, 한국의 김인식 감독은 이치로에 대해 이런 명언을 남겼다. “그는 일본만의 선수가 아닙니다.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때 우리는 그에게 응원을 보냈습니다. 그는 동양을 대표하는 선수입니다. 경솔한 언행을 하면 안 되죠.” 역시 감독님, 정말 정답입니다요. 저도 2009년 WBC에서 여전히 호타준족이지만 더욱 성숙해진 이치로를 만나기를 바랍니다요.

그런데 차범근은 왜 저평가 됐을까

추신. ‘역대’ 아시아 최고 스포츠 스타를 꼽으라면, 이치로와 차범근을 놓고 고민했을 것 같다. 애국심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이상하게도 차범근의 가치는 저평가돼 있다. 영국의 오웬도, 독일의 발락도, 포르투칼의 피구도 “나의 우상”이라고 헌사를 바친 ‘차붐’ 아니던가. 1979년 유럽연맹(UEFA)컵 결승전에서 차범근을 전담 마크했던 마테우스는 경기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는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다.” 이날 차범근은 마테우스를 따돌리고 결승골을 어시스트했고, 경기의 최우수 선수로 뽑혔다. 이 마테우스가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최우수 선수로 뽑혔던 그다. “차범근과 박지성 중 누가 더 유명한가요?” 차범근에게 무례한 질문이다. 아직 둘은 비교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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