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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히딩크가 선택한 ‘장밋빛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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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2-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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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량·투사적 기질 탁월한 선수 선호… 박성배·심재원은 찰떡 궁합, 박진섭은 밀려나

사진/히딩크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박성배. 그는 투지와 스피드 폭넓은 움직임으로 그라운드를 누빈다.(윤운식 기자)
‘선수의 운명은 감독 만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다. 감독이 그 선수를 어떻게 평가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뒤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98프랑스월드컵 대표로 활약하며 98프로축구 신인드래프트 1순위로 천안일화(현 성남일화)에 입단했던 장대일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장대일은 일화에서 큰 빛을 보지 못하다가 대학(연세대) 스승인 김호곤 감독이 있는 부산아이콘스로 옮기면서 주전의 자리를 꿰차고 간판스타로 떠오르고 있다.

요즘 한국축구판의 최대 화두이고 화제인 거스 히딩크(55) 감독에게도 이같은 선수와의 ‘궁합’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히딩크 감독뿐 아니라 대부분의 감독에게는 자신의 지도스타일에 맞는, 선호하는 선수들이 있게 마련이다.

스피드·체력·투지로 무장해야 지지받아


새해 1월13일 히딩크 감독이 한국축구 국가대표팀을 지휘하기 시작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누구인가. 공격수 박성배(전북현대)와 수비수 심재원(부산)이 두드러진다. 두 선수는 그동안 국가대표와 올림픽 대표로 활약했지만 사령탑의 전폭적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히딩크 감독이 왜 두 선수를 주목하는 것일까. 그것도 그동안 뛰던 위치를 이동해가면서까지.

박성배와 심재원에 대한 기용의 해답만 찾으면 히딩크 감독의 ‘선수 기호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박성배는 투지와 스피드, 폭넓은 움직임이 높은 평점을 얻었다. 심재원은 헤딩력이 좋고 수비수로는 스피드가 좋다. 공통점은 ‘스피드 체력, 투지’ 등이다. 히딩크 감독이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한국대표팀과 2002월드컵에 대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 체력적 부분과 조직의 보완이 이뤄지면 된다”고 말한 것과 부합한다.

일단 박성배를 보자. 박성배는 지난해 FA(축구협회)컵 대회에서 MVP에 올랐지만 국제무대에서는 아직 무명이다. 히딩크 감독은 박성배의 투지를 높게 샀다. 코뿔소처럼 저돌적인 모습과 스트라이커나 오른쪽 날개, 어디를 맡겨도 제몫을 해낼 재목이란 점에 주목한다. 히딩크 감독이 훈련이나 경기 중에 선수들에게 “큰소리로 말을 해라. 왜 입을 다물고 있느냐. 그래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겠나”라고 질책하는 것에서 박성배에 대한 ‘사랑’의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심재원은 어떤가. 그는 허정무 감독 아래에서는 중앙 수비수로 활약했다. 헤딩이 좋고 수비수로는 스피드가 수준급이어서 박재홍(상무)과 함께 장래가 밝은 수비수 재목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박재홍이 허정무 감독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한 것과는 달리 심재원은 대체요원이었다. 심재원은 히딩크 체제에 들어와서 오른쪽 윙백으로 위치를 옮겼다. 그동안 박진섭이 ‘안방’처럼 차지하고 있던 자리이다. 울산 훈련 중 가진 연습경기와 2001홍콩 칼스버그컵에서 그는 주전으로 성장했다. 아직 수비에는 위치선정 등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스피드와 투지, 공격가담 등 가능성을 보여줬다.

히딩크 감독이 심재원을 오른쪽 윙백으로 발탁한 것은, 이영표(안양LG)의 수비형 미드필더 기용과도 연관이 있다. 그동안 수비라인에 이영표, 박진섭을 기용한 적은 있지만 주목하지는 않았다. 2002월드컵 등 국제무대에서 만나게 될 유럽국가들과의 대결에서는 신장이 적고 체력(체격)적 부담이 있는 선수들은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히딩크 감독의 지론이다. 그래서 이영표, 박진섭은 수비수로 경쟁력을 잃었다. 허정무 감독 시절의 ‘좌 영표, 우 진섭’은 이제 해체된 것이다. 히딩크 축구의 포백라인에는 김태영(전남)-이민성(상무)-홍명보(가시와 레이솔)-심재원(부산)이 포진해 있다. 키가 모두 180cm를 넘는다. 이 밖에 후보선수인 이임생(부천SK), 김영선(수원삼성), 김현수(성남일화) 등도 모두 180cm를 훌쩍 넘는다. 허정무 감독 아래에서 ‘황태자’로 군림하던 박진섭(상무)이 설 자리를 잃은 이유다.

황태자 박진섭이 설 자리를 잃은 까닭

사진/허정무 감독 시절 황태자로 불렸던 박진섭.(AP연합)
박진섭은 재치있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패스로 그동안 감독과 팬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윙백으로는 스피드가 떨어지고 상대 수비수를 따돌릴 만한 탁월한 개인기도 갖추지 않아 중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스피드가 별로지만 개인기와 패스워크가 뛰어난 고종수(수원)가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울산 훈련과 홍콩 칼스버그컵을 거치면서 히딩크 감독의 눈길을 비껴간 선수는 박진섭 외에도 김영선 정광민(안양)이 있다. 이들은 느리고(김영선) 투지가 부족(정광민)하다는 이유로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히딩크 사단’에서 살아남으려면? ‘투사’(鬪士)가 돼야 한다. 아니면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개인기량과 특기를 가지고 있든지. 고종수나 홍명보처럼. 아니면 적자생존(適子生存)의 법칙에 따라 도태될 수밖에 없다.

박진섭의 얘기가 나왔으니 허정무 감독 시절의 ‘황태자’들도 한번 따져보자. ‘허정무 호’에서는 박진섭과 박재홍이 대표적 성공사례였다. 허정무 감독이 치른 A매치(국가대표팀간 경기)와 올림픽대표팀의 경기에는 거의 결장없이 그라운드에 나섰다. 허 감독 재임 2년 동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들만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고 김상식(성남일화)과 박지성(교토 퍼플상가), 이영표는 허 감독이 무명의 선수를 발탁한 케이스. 김상식과 박지성은 국가대표로는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허 감독은 적극적으로 중용했다. 김상식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제공권이 탁월하고 몸싸움을 아끼지 않는 ‘살림꾼’으로, 박지성은 눈에 띄지 않지만 많이 뛰면서 궂은 일을 해주는 장점을 갖춰 허 감독을 매료시켰다. 이영표는 이제 설명이 따로 필요없는 스타가 됐다. 허 감독이 고민하던 왼쪽 윙백의 약점을 메워 주었다.

허 감독의 눈 밖에 난 선수도 있었다. 이름에 비해 소홀한 대접을 받은 경우다. 김병지(포항), 고종수는 ‘튀는 행동’으로 눈 밖에 났고 유상철(가시와), 최용수(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등도 이름값에 비해서는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다.

1년6개월, 히딩크는 누구를 선택할 건가

사진/탁월한 개인기량으로 히딩크 감독의 총애를 받는 고종수와 홍명보.(AP연합)
2년을 더 거슬러올라가 보자. 꼭 4년 전인 97년 초, 98프랑스월드컵을 준비하면서 출범한 차범근 감독의 월드컵대표팀. 이때는 프랑스월드컵 본선무대까지 ‘황태자’들에 대한 뒷얘기가 끊이질 않았다. 당시 차 감독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선수는, 최영일 이상윤 장형석 등이다. 최영일은 철저한 대인마크 능력으로, 이상윤은 위기마다 터뜨려준 한방으로 감독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장형석은 수비와 미드필드에서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 기용됐다. 그뒤 최영일은 부산-랴오닝(중국)-안양LG를 전전하다가 은퇴했고 장형석은 울산현대에서 안양LG로 트레이드된 뒤 부상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이상윤은 지난해 성남일화의 도약을 이끌었지만 지난해 말 부천SK로 팀을 옮겼다.

반면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리던 최용수는 본선무대에서는 감독과의 불화로 기용조차 힘든 상황에 처했지만 지금은 2000프로축구 MVP의 영예를 안고 일본 J1리그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로 이적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빛과 그림자는 항상 함께하는 법이다. 한국의 국가대표팀 감독은 말 그대로 ‘부침’이 심한 자리다. 처음에는 ‘희망’을 던져주면서 초점의 대상이 되지만 나중에는 ‘좌절’을 맛보며 사라져간다. 차범근 감독도, 허정무 감독도 그랬다.

이제는 히딩크 감독이다. 현재 우리는 그에게서 ‘희망’이란 단어를 본다. 그러나 언제 또다른 변수가 나타날지 모른다. 히딩크 감독이 영광과 명예를 함께하려면 결국 ‘궁합’이 잘 맞는 선수들과 팀을 잘 꾸려가는 일밖에 없다.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또 어떤 선수들이 새로운 스타로 떠오를지, 1년6개월 동안 기다리며 지켜볼 일이다.

박정욱/ 스포츠서울 축구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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