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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타협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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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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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오마이섹스]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제주도로 ‘묻지마 여행’을 다녀온 ○은 돌아오는 날 “이이이건 아니야~” 읊조렸다. 남자는 공항에서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 가족(아내 포함)에게 줄 귤박스를 사서 대롱대롱 들고 다녔다 한다. 그 남자가 바지 안에 검은색 팬티 스타킹을 신고 있는 걸 목격한 때나, 그 팬티 스타킹이 아내의 지극한 애정 혹은 공포(가장이 얼어죽을까봐)의 산물이라는 것을 안 순간 약간 다른 종류의 웃음(앞엔 폭소, 뒤엔 쓴웃음)이 나왔지만, 기분을 잡치지는 않았단다.

숙소에서 늘 ‘쉬었다’ 나와야 하는 거,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아빠아~” 하는 전화, 휴일이나 명절이면 틀림없는 연락 두절…. 이런저런 불편을 감수하며 불평 없이 만나왔지만 귤박스만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게 ○의 지론이다. 이유도 독특하다. 남자의 지극한 ‘가족 사랑’에 열받아서? 아니다. 여행의 미감을 망쳤다는 것이다. ○은 삼촌 조카 사이 같아 보이는 그 남자와의 ‘동행’에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계관의 문제라면서. 하지만 귤박스 들고 다니는 남자 옆에 마누라도 딸내미도 아니면서 붙어 있는 여자로 보이는 건 구멍난 양말을 내놓고 샌들 신는 거 같은 꼴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사람마다 ‘페티시’가 다르듯 ‘도무지 참지 못하는’ 요소도 다르지만, 왠지 ○이 관계를 끝내기 위한 ‘명분’을 찾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질 때가 되면 상대의 음식물 씹는 입모양이나 바지주름 잘 잡힌 것까지 짜증날 수 있다. ‘부적절한 관계’라면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면 된다. 문제는 ‘적절한 관계’ 사이다.

오래되고 안정된 관계에도 위험이 도사린다. 지겨움 혹은 뻔함. 섹스도 쇼핑도 여행도 새로울 게 없다. ‘통계적으로 볼 때 앞으로 이 남자는 계속 팔릴 텐데 나는 안 팔리겠지’ 하는 ‘나홀로 분석’을 명분 삼아 부단히 다른 남자를 만나왔던 나는, 어느 날 내 남자에게 “딴 여자 만나도 돼”라고 귀띔했다. 나 편하려고 그랬다. 그는 빙그레 웃었는데 어느 날 못 보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어떤 언니가 와이셔츠와 함께 선물했다고 한다. 갑자기 머리 속에서 좌르르 손익계산서가 그려졌다. 이 정도면 내 남자가 저녁(+α)은 대접했을 테고 그랬다면 비용은? 나는 “고작 와이셔츠나 얻어입냐. 양복도 아니고…” 구박했지만, 양복에 준할 대접을 생각하니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애정도 아깝지만, 돈은 더 아깝다. 확실히 ‘경제 공동체’는 일상의 일탈을 막는 유력한 장치이지 싶다.

내가 견디기 힘든 남자는 애인(혹은 애인이었으면 하는 여자)에게 지 마누라 욕하는 남자다. 혹은 헤어진 마누라나 옛 애인에게 관계 파탄의 모든 책임이 있다고 덮어씌우는 남자. 레퍼토리도 뻔하다. 집착이 강하고 시가에 못하고 이해심 없고 씀씀이 헤프고… 그러니 위로해달라 이거다. 그것도 말로 말고 몸으로. 남자의 징징댐에 따르면 한마디로 ‘마귀 같은 여자’가 골랐던 남자를 내가 지금 만나는 건데, 위로받을 사람은 나거든? 이런 남자랑 살거나 살았던 여자에게 진짜 “아임 소리”다. 타협 불가능한 지점이다. 이런 남자에게는 절대 안 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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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오마이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