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트씨 고아원>의 사진작가 주명덕씨, 초기사진 모아 작품집 펴내다
경기 일산 외곽지역의 푸른 농토 한가운데 서 있는 인쇄공장의 2층. 변두리에 서 있는 공장들이 그렇듯 가건물처럼 칙칙하고 어설퍼 보이는 건물 2층에 사진작가 주명덕(60)씨의 작업실이 있었다. 좌회전과 우회전을 거듭하는 작가의 설명을 듣고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헤매면서 나지막한 시골의 토담집을 기대했던 기자에게는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함께 작업실에 있는 제자의 안내를 받으며 올라간 2층. 인쇄용지가 수북이 쌓여 있는 방을 지나 작업실의 방을 여니 구노의 가곡 멜로디가 방 한가득 진동한다. 입구 앞에 놓여 있는 받침대용 고가구 위에 놓여 있는 마른 꽃들, 벽을 장식한 사진 포스터와 회화작품, 그리고 50년은 족히 넘어보이는 라디오. 노예술가의 수수한 미감은 ‘공장’의 삭막한 콘크리트 벽마저 예술적 온기로 바꾸어 놓았다. 여백이 많은 방 한가운데 서 있는 촬영용 사다리에는 긴 바바리 코트와 베레모, 그리고 카메라 가방이 놓여 있다.
사진은 그냥 보고 느끼면 되는 것
“재밌잖아.” 은색의 곱슬머리가 언제 깎았을까 싶게 들쭉날쭉한 작가가 ‘썰렁한’ 장식을 방 한가운데 해놓은 이유는 간단했다. “뭐 할말이 있겠어? 사진은 그냥 보고 느끼면 되는 거지.” 자신의 작품들에 붙이는 설명도 참으로 간단하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지극히 평범한 원론이지만 생각해보면 또 그만한 정답도 없다. 주씨의 말마따나 이러쿵 저러쿵 주석을 달아야 하는 사진은 이미 고유의 예술적 가치가 훼손된 사진일지도 모른다. 기자의 이러저러한 질문에 작가는 여러 작품집과 전시도록을 펼치며 대답을 대신한다. 마음으로 보고 느낀 대로 쓰라는 요구, 또는 조언일 것이다.
최근 주씨는 초기작품 103점을 모아 <주명덕의 초기사진들>이라는 제목의 두툼한 작품집을 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후배와 제자들이 십시일반해 상재한 책이다. 이 책에는 작가가 취미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작품의 중심이 되었던 변두리 사람들의 표정이 담겨 있다.
“그때는 사진을 통해 사회의 문제점을 찾고 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사진작가의 소임이라고 생각했어. 사진 이야기만 나오면 앉은 자리에서 두 시간, 세 시간씩 자리를 떠날 줄 몰랐던 시절이었지. 지금은 누가 사진에 관해서 이야기하라면 5분도 못할 것 같아. 보고 느끼는 것 외에 무슨 할말이 있겠어요.”
작품집을 열면 이 책에 실려 있는 다른 작가의 작품 두개 가운데 하나가 첫장을 장식한다. 대학도 때려치우고 부모님 속을 썩혀가며 사진만 찍고 있던 스물여섯살 무렵의 작가 자신이다. 한손에 카메라를 들고 이쪽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매와 꼭 다문 입술에는 이 시절 사회의 환부에 카메라를 들이대던 작가의 패기와 고집이 담겨 있다. ‘작가’보다는 ‘백수’라는 이름이 더 익숙했던 그 시절 그는 우리 사진사에 한획을 긋는 ‘사고’를 쳤다. 66년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열렸던 첫 개인전 ‘홀트씨 고아원’. 카메라를 빨아들일 듯 커다란 눈으로 응시하는 혼혈아이들의 말간 표정, 남루한 옷차림의 티없는 웃음들, 이번 작품집에서도 비중있게 담겨 있는 이 전시작품들은 우리 사진이 근대에서 현대로 훌쩍 뛰어넘은 분수령으로 기록된다. 이 전시는 ‘생활주의’로 정리되는 60년대 리얼리즘 사진과 결별을 고하면서 새로운 다큐멘터리 사진의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학 시절 우연하게 사진서클에 들어간 다음부터 공부는 일찌감치 작파한 셈이야. 아침부터 음악감상실로 등교하면서 음악듣는 것과 사진 찍기에 하루를 전부 보내던 시절이었어요. 홀트씨 고아원에서 자원봉사하던 누이를 만나러 갈 일이 있었지. 그때 아이들을 보고 가슴이 뛰어서 찍기 시작했어. 2년 정도 찍었을까, 사진하던 한 선배가 전시회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말하더군. 말이 전시회지, 친구들끼리 모여 손바닥만한 사진을 벽에다 붙이고 안내문이나 포스터도 일일이 손으로 쓰고 그린 학예회 수준이었어.”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이 전시는 각 일간지 문화면에 톱기사로 올랐고 한국전쟁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주씨에게는 광적인 취미로 하던 사진을 평생의 길로 안내해준 계기이기도 하다.
주씨는 68년부터 73년까지 <월간중앙>의 사진기자로 일했다.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직장인으로 보낸 시기다. 이 시절 주씨는 ‘한국의 가족’, ‘은발의 한국인’, ‘명시의 고향’ 등 기획을 연재하면서 ‘한국적인 것’의 천착으로 작품세계를 옮겨갔다.
“당시가 유신 시절이었는지라 사회가, 그리고 매체가 도대체 다큐멘터리 사진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심지어 이화여대 교수로 있던 이효재씨와 함께 기획한 ‘한국의 가족’ 시리즈도 당국의 압력으로 중도 하차해야 했으니까요.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없는 사진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다큐멘터리 사진을 포기하게 됐고, 반자의적으로 흥미가 다른 쪽으로 돌아간거지.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더 넓은 세계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지만 어쨌거나 비겁했던 작가인 셈이야.”
이 책에서 40쪽가량을 할애하고 있는 ‘한국의 가족’ 시리즈는 70년대 초 빈궁하던 서울 변두리와 시골의 가족들을 담고 있다. ‘홀트씨 고아원’보다는 피사체와 작가간의 심리적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고단한 한 집안의 가장과 천진한 아이들을 담는 그의 앵글에는 여전히 애정이 넘친다.
주씨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이것은 사진을 찍을 때 뿐만 아니라 일상을 사는 그의 생활신조다. 사진기자를 할 때도 그는 만나는 사람들을 업무로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때 만난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불쑥 전화하고 밤 열시건 열두시건 그의 집을 찾는다.
“정릉 꼭대기에 살 때였는데 집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어요. 적게 와도 한달에 100명 이상 손님들이 왔었으니까. 소설가 김승옥씨는 부부싸움만 했다 하면 우리집을 찾아오곤 했어.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를 하던 아내의 친구들도 다 내친구였으니까 다들 제집처럼 드나들었지.”
그는 그 시절 만난 소설가와 미술가, 음악가들이 그의 사진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사람뿐 아니라 예술이란 다른 분야에 의해 영향받고 영향을 주면서 발전한다는 것이 그의 예술론이다. 그래서 사진에만 몰두한다며 다른 예술분야에 무심한 후배들을 보면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예순 넘어 변신을 꿈꾸다
“젊을 때는 나도 조바심이 많았지. 30대에는 뉴욕현대 미술관에 작품이 전시돼야 한다. 40대에는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던 일본 작가 하마야 히로시를 뛰어넘어야 한다, 뭐 이런 것들이었어. 지금은 나로서 족해. 물론 아직도 세계적인 인정을 받으며 전시를 하고 싶지. 그러나 그렇게 안 돼도 내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해.”
초창기 다큐멘터리 사진과 70∼80년대 ‘한국’사진을 넘어 80년대 말부터 그의 사진은 다시 한번 변신했다. 자연의 모습을 미시적으로 관찰하는 그의 작업은 관조적이고 추상적으로 변했다. 올해로 환갑이 된 그는 또다시 변신을 꿈꾼다.
“앞으로 두번 정도 더 작품세계를 변화시키고 싶어요. 내가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고, 신의 뜻에 달려 있겠지. 그렇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아쉽지는 않을 거야. 평생 사진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게 신의 축복이었으니까.”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그때는 사진을 통해 사회의 문제점을 찾고 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사진작가의 소임이라고 생각했어. 사진 이야기만 나오면 앉은 자리에서 두 시간, 세 시간씩 자리를 떠날 줄 몰랐던 시절이었지. 지금은 누가 사진에 관해서 이야기하라면 5분도 못할 것 같아. 보고 느끼는 것 외에 무슨 할말이 있겠어요.”












